앞서 보았듯이 코앞까지 밀어닥친 거란군을 피해 고려 현종 왕순은 1010년 12월 28일 임신壬申, 양력 2011년 2월 3일 남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드라마는 현종이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려다가 할 수 없이 피했다고 해서 고뇌에 찬 군주의 모습을 그렸지만,
실상은 전연 달라 이날 밤 몰래 후비后妃 몇 명과 이부시랑吏部侍郞 채충순蔡忠順을 포함한 금군禁軍(궁궐 수비대) 50여 인과 더불어 아주 단촐한 규모로 경성을 빠져나갔다.
소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꼼수였다.
밤새 달린 현종은 이튿날인 1010년 12월 29일 계유季酉에는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이란 곳에 이르고 다시 그곳을 떠나 날이 저물어서야 창화현昌化縣이란 곳에 이르렀다.
앞 지도를 보면 이날 임진강을 도하했음을 본다.
아마 그쪽 현 치소에서 머물렀을 그는 날이 밝자 도봉사道峯寺라는 사찰로 들어갔다.
이 도봉사가 지금의 서울 도봉산 도봉사일 듯한데, 그렇다면 이동 경로는 이렇다.
1010년 12월 30일 갑술甲戌, 양력 1011년 2월 5일, 현종은 양주楊州에 묵었다 했으니, 양주는 당시 대도시급에 속하는 곳이라, 아마 행색은 초라하지는 않았을 법하다.
이어 행렬은 지금의 서울 도봉구 일대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니 이곳에서 숙박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 이튿날인 1011년 1월 1일 을해에 거란이 개경을 점령하고는 궁궐을 불태우는 그날 현종은 광주廣州에 있었다 하니, 그곳에 사흘간 머물렀다 하니, 남하를 계속해 지금의 경기도 광주 일대로 옮겼음을 본다.
양주에서 광주까지 이동경로는 대략 앞 지도 같았을 것이다.
1011년 1월 4일 무인戊寅, 양력 1011년 2월 9일, 광주를 출발해 비뇌역鼻腦驛이라는 곳에 머무른다. 이 비뇌역이 어딘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의 후속 행로를 보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튿날인 1011년 1월 5일 기묘에 양성陽城이라는 곳으로 행차했다 하니, 이곳이 지금의 안성시 양성면 일대다.
그렇다면 그의 몽진 루트는 대략 앞 지도와 같다. 비뇌역은 저 루트 중간에 위치할 것이다.
이어 같은 날 몽진 행렬은 사산현蛇山縣을 거쳐 천안부天安府에 도착한다. 이 구간 몽진 루트는 대략 아래와 같다.
이어 1011년 1월 7일 신사에 현종 일행은 공주公州에 도착해 절도사節度使 김은부金殷傅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는 파산역巴山驛을 거쳐 여양현礪陽縣에서 체류한다.
이 여양현을 지금의 익산이 여산면 일대라 하는데 그것이 맞다면 이동 루트는 아래와 비슷했을 것이다.
유의할 점은 이때 차령산맥 고개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공주는 하루 정도 머물 법한데, 그냥 지나치고 곧장 전주 방면으로 향한 모습을 본다. 그만큼 급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1월 8일 임오, 양력 2월 13일, 삼례역參禮驛에 도착해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의 접대를 받았지만 전주는 옛 백제땅이라 해서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가서 거기서 하룻밤을 묵는다.
이 장곡역이 지금의 앵곡역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이때 루트는 대략 아래와 같다.
한데 이때 변수가 발생한다. 1011년 1월 11일 을유, 양력 2월 16일에 거란군이 철수를 단행한 것이다. 다만 그런 소식을 아직 몰랐으므로 현종은 더 열심히 남쪽을 향해 달려간다.
거란군이 퇴각을 시작한 이튿날인 1월 12일 병술丙戌, 양력 2월 17일, 현종은 인의현仁義縣을 지나 수다역水多驛에 묵고는 이튿날인 1월 13일 정해, 양력 2월 18일에 마침내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에 도착한다.
인의현은 태인, 수다역은 정읍시 입암면에 있었으니, 노령산맥을 남쪽에 두고 1박을 했음을 본다.
전주에서 나주까지 이동경로는 대략 아래와 같을 것이다.
이제 더는 남쪽으로 내려갈 데도 없는 현종한테 나주 체류 사흘만인 1월 16일 경인에 반가운 소식이 도달한다. 거란군이 철수했다는 전갈이었다.
그래서 한숨 놓은 그는 이제는 탱자탱자 룰루랄라 맘껏 퍼질러 놀다가는 1월 21일 을미乙未, 양력 2월 26일에 귀경길에 오르게 된다.
이 몽진 루트를 대략 하나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이는 당시 교통로라는 측면에서 많은 논급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유의할 점이 많은데 첫째 현종이 뻘짓을 했다.
거란군은 임진강 혹은 한강을 넘은 적이 없다. 그를 사로잡아 항복 조인식을 하고 싶었겠지만 하도 줄행랑을 빨리치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임진강 혹은 한강도 넘지 않은 거란군이 무서워 열라 달려 내려갔으니, 뒤돌아봤을 때 얼마나 뻘쭘했겠는가?
둘째 그가 주로 묵은 곳은 역참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모르겠지만, 좀 더 편안했을 객사 같은 데를 놔두고 저리 한 데는 모종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셋째 몽진 속도가 앞서 언급했듯이 우사인 볼트보다 빨랐다. 왜 그랬을까 말을 타고 갔기 때문이다.
페라리급으로 달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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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튄 현종, 보름 만에 날아서 나주에 닿다
#고려거란전쟁 #현종피난길 #몽진 #교통로 #현종의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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