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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울릉도는 공도空島가 아니라 왕화王化 밖이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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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 시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 기성록箕城錄 ○ 잡저雜著에 수록된 울릉도설蔚陵島說이라는 논설이다.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 있는 섬으로, 육지와의 거리가 몇 백 리가 되는지 모른다. 매년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즈음 흐릿한 기운이 말끔히 걷히고 바다가 청명할 때, 영동嶺東으로부터 바라보면 마치 한 조각 푸른 이내가 수평선 저편에 가로놓여 있는 것과 같다. 유독 진주부眞珠府가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召公臺에 오른 이들은 더러 이 섬의 숲과 묏부리의 형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으니, 이로써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루나 사슴, 갈대, 대나무 따위가 왕왕 바닷가 백사장에 떠밀려 오고,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서 바다를 건너 해변까지 와서는 그만 힘이 빠져 날갯죽지를 드리운 채 떨어져 아이들에게 잡힌 적도 많다. 그리고 어부나 뱃사공 가운데에는 혹 표류하여 섬 가에 당도했다가, 채소 뿌리와 나물 잎이 물결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과 사면이 모두 검푸른 암벽뿐이되 오직 덩굴풀을 더위잡고 들어갈 수 있는 동문洞門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으나, 지키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어 그냥 주위를 서성댈 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노를 저어 돌아온 자도 있었다.”

하였으니,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이란 말인가. 어쩌면 부역을 피하거나 죄를 짓고 도망쳐 온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혼인을 맺어 점점 인구가 불어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니면 오랑캐 종족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섬을 점거하여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과연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찌 한 번쯤 배를 타고 육지를 왕래한 적이 없겠으며, 어찌 다른 곳과 물건 하나 교역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의심이 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지만 결론을 얻지 못하여 끝내 이 섬을 모호하고 흐릿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남겨두고 마니, 이 어찌 한퇴지韓退之가 이른바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황당하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신선에 대한 말들이 있어온 지 이미 오래이나, 이른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란 것들이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며, 곤륜산崑崙山의 현포玄圃를 본 사람은 또한 누구란 말인가. 가령 신선이 없다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있다고 한다면 이 섬이 봉래나 곤륜 중 하나로 이인異人과 선객仙客이 살고 있는 곳일지 어찌 알겠는가.

한 폭의 돛을 순풍에 높이 달면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이 섬에 당도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의 번다한 의혹들을 이로써 깨뜨릴 수 있을 터인데, 이 섬에 가보지 못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갓 목을 빼고 동쪽을 바라보면서 속절없이 몽상夢想과 시편 속에서나 그려보게 한다. 슬프다!

[주-D001] 현포玄圃 : 곤륜산 정상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곳.

 
울릉도는 줄곧 이야기하지만 한반도 역대 정권 왕화王化 밖에 위치하는 곳이었다.

더 간단히 말해 근대 국민국가 개념으로는 결코 한국 땅이었던 적이 없다.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가 잠깐 군사를 내어 점령했다지만, 그것이 영속이 아니었고, 여진 말갈 소굴 잠깐 소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이내 버려졌다.

고려시대 역시 마찬가지였고, 조선왕조에서도 말이 좋아 공도空島 정책이지, 공도란 우리 땅을 여러 이유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관리한다는 뜻이지만, 조선왕조는 그렇게 울릉도를 생각한 적이 없다. 

울릉도는 또 다른 세계였다. 그것을 국민국가 시대가 개막하고 영토를 준거로 하는 국가 기반이 조성되면서 비로 우리 땅이어야 한다는 믿음 강박 윽박이 작동했다. 

21세기 대한민국으로서는 그때의 내셔널리즘이 고마울 수밖에 없는 점은 그것을 재빨리 대한제국 혹은 대한민국 영토로 선언하고 점유해 버린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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