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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雜談

안중근 의사 유족을 모시고 함께한 시사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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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화 (안중근의사기념관 학예연구사)


안중근 집안(조부 안인수를 정점으로 하는 팔촌친 공동체)에서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16분을 배출했다.

어느 집안도 이를 따라갈 수 없는데 이렇게 한 집안에서 대거 독립운동을 하면 그 가문의 경제적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가기 마련이다.

한양 제일 갑부라던 이회영 육형제는 전 재산을 털어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는데 그 형제 중 이석영 선생은 말년에 상해에서 두부 찌꺼기로 연명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황해도 해주에서 부유하기로 이름난 안중근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원래 풍족하던 가산을 안중근 생전에 국채보상운동 참여와 삼흥학교 설립에 크게 소모하고(석탄회사와 채표회사 경영도 실패) 나머지 가산은 안중근 사후 온 식솔이 국외로 망명하면서 사라져버렸다.

근거지를 잃은 대규모 망명 가족이 선택한 데는 독립운동이었다. 그 길만이 영웅 안중근의 유지를 잇는 길이기도 했으며 그 길만이 고향으로 돌아가 가문의 기반을 다시 찾는 길이기도 했다.

두 동생 정근, 공근은 각각 도산, 백범과 손잡고 임시정부 산하 대한적십자회와 한인애국단을 이끌었다.



사촌 명근은 총독 데라우치 암살을 모의했고, 어머니 조마리아도 직접 임정 경제후원회 위원을 지내며 독립운동 일선에 섰다.

비록 안중근 직계인 아들 준생과 사위 황일청이 1939년 만선시찰단에 포함된 이래 변절 시비에 걸렸으나 그 외 사촌, 육촌들은 더욱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안중근 조카 항렬까지 대부분이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약했음은 물론이다.

오늘 안중근 조카 안봉생(임정 군무부 행정관, 건국훈장 애국장, 백부가 안명근이고, 친동생이 초대 육사 교장 안춘생이다)의 딸인 안기영 여사를 모시고 시사회를 함께하였다.

해방 전 만주 목릉에서 태어난 여사는 2차대전 말 소련군 만주작전 당시 후퇴하는 관동군을 따라 남하했다고 한다.

당시 소련군 진격 속도가 워낙 빨라 그들이 곧바로 한반도 북쪽으로 진주했기에 여사 가족은 중국 관내로 들어가 상해로 향했고 이후 장개석 국민당군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가 49년에야 귀국하였다. 황해도에 가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21일 오후 서울 한강로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뮤지컬 영화 '영웅' 시사회에서 안중근 의사의 재종손 안기영 여사가 인사말을 한다. 2022.12.21 [국가보훈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현재 안중근 직계 후손들은 국내를 떠나 국외에 거주한다. 안중근 유해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더구나 분단으로 고향에는 가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만두집 장면을 보고 어릴적 중국에서 먹던 만두가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여사 모습에서 한국현대사 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안중근가사람들


*** 편집자注 ***


여러 번 내가 쓴 말이기도 한데, 안중근家도 그렇고, 이회영家도 그러한데 나는 막스 베버 개념을 빌려 '직업으로서의 독립운동(가)'로 불러야 한다고 본다.

단순히 저들이 독립심이 강했다는 말 한 마디로 설명할 순 없다고 본다. 저들한테 독립운동은 어쩌면 직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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