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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에 인구압에 의해 일본열도로 이주가 시행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닌데,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현해탄을 경계로 과연 한국의 청동기시대와 일본 야요이시대 초창의 촌락이 비슷한 방식으로 도작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게 문제겠다.
필자가 생각하기엔,
일본이 논의 비중도 훨씬 높고, 잡곡에의 의존도도 낮았던 것 아닌가 싶다.
이것은 물론 향후 학계의 연구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만...
그러고 보면,
야요이인은 우발적으로 열도에 건너간 사람들도 아니고,
인구압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짐 싸들고 현해탄을 건넌 사람들도 아니다.
일본열도의 기후가 벼농사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어떤 이유에서든 터득하고,
자신들이 한반도에서 시행하던 도작과 잡곡 중
도작에 훨씬 집중하겠다는 명확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이주한 것 아닌가 싶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파운데이션, 플랜테이션을
열도에 만들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난민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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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과 잡곡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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