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본기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현종 즉위년인 1009년 2월에 교방敎坊을 파하고, 궁녀 1백 여 인을 풀어주는 한편. 양원정閬苑亭을 허물고 진기한 길짐승·날짐승·어류[珍禽奇獸龜魚之類]를 산과 못에 놓아주었다고 했거니와,
이 양원정이라는 데가 동식물원과 수족관을 겸한 시설임을 안다.
저 양원정은 구체 양상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어, 그 명칭 풀이로 그 성격을 가늠할 수밖에 없으니, 위선 음을 【당운唐韻】에선 來와 宕의 반절, 【집운集韻】과 【운회韻會】, 【정운正韻】에서는 郞와 宕의 반절로 음은 량浪이라 했으니, 소리는 량임을 본다.
그 의미에 대해 【설문說文】은 門高也라 했으니 솟을대문임을 알겠지만, 그 솟은 데는 광활한 빈 공간이라 그런 까닭에 다른 의미로 空虛也라 했다. 【관자管子·도지편度地篇】에 이르기를 城外爲之郭,郭外爲之土閬。곧 성 바깥을 곽郭이라고, 곽 밖을 량閬이라 한다 했으니, 광활한 공간을 저리 말했음을 본다.
따라서 양원정閬苑亭은 터가 무척이나 넓은 원림이되, 정자를 갖춘 곳임을 본다. 정자가 있으니 당연히 연못이 있었고, 거기에 진귀한 물고기를 길렀음을 본다.
그렇다고 이때 고려가 동식물원을 폐쇄했는가? 그렇지는 아니해서 계속 운영했음을 보니
정종靖宗 4년(1039) 12월 21일 계미癸未에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 건의에 따라 동지東池에서 기르던 백학白鶴과 거위와 오리, 산양山羊을 놓아준다. 동지는 명칭으로 보아 궁궐 동쪽에 있던 연못으로 보나마나 동궁이 기거하던 데도 이곳에 있었다.
저들 백학과 거위와 오리, 그리고 산양은 말할 것도 없이 먹이를 주어 기르며 완상하던 동물이니, 문제는 엄청나게 쳐먹어대는 먹이였다. 매번 이야기하듯이 모든 것이 돈 때문이다. 얼마나 쳐먹어댔겠는가?
의종毅宗 14년(1160) 3월 18일 정유丁酉에는 나들이갔다 환궁한 왕이 양부兩府의 재추宰樞와 시신侍臣을 불러 어원御苑에 있는 화초와 진기한 금수禽獸를 감상토록 하고는 이어 술과 과일을 하사했다 했다.
동물원과 식물원은 인간 욕망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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