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첨姜民瞻은 진주晉州 강씨라, 강감찬과 본관이 같고 무엇보다 활동연대도 겹친다. 또 같은 서생 출신으로 이른바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이끈 전쟁 영웅이다.
강민첨은 전쟁 영웅인 까닭에 고려사와 절요에는 죽은 시점이 명확히 보이니 1021년, 현종 11년 11월 12일 계미癸未가 그때라 이르기를 “지중추사知中樞事이면서 병부상서兵部尙書인 강민첨姜民瞻이 졸卒했다”고 해서 현직 상태에서 죽었음을 본다.
각종 사전에는 그가 광종 14년, 963년 진주에서 원윤 벼슬을 지낸 아버지 강보능姜甫能과 거창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근거가 아마 진주강씨 족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는 그가 목종(재위 997~1009) 시대에 과거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정확한 등제 시기는 알 수 없다.
강감찬과 비교하면 강민첨이 어렸음은 분명한데, 강감찬이 그렇듯이 서생임에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내는 이상한 행적을 보인다.
그는 위선 현종 3년, 1012년 5월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을 침략하자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와 더불어 도부서都部署 관원으로서 주군州郡 병사들을 독려해 격퇴하는 공로를 세우더니,
현종 8~9년(1018~1019)에 발발한 제3차 고려거란전쟁에서는 상원수上元帥 강감찬을 보좌하는 넘버 투 사령관인 대장군大將軍으로 군사 20만8천300명을 이끌고 출전해, 8년 12월 10일 무술戊戌에는 거란 부마駙馬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맞아 흥화진興化鎭 근처 산골짜기에서 대파했다.
이 공로로 응양상장군 주국鷹揚上將軍柱國으로 발탁되었다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옮겼고, 현종 10년 12월에는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라는 칭호를 받고는 이듬해에는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가 되었다가 그 이듬해에 죽으니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됐다.
이 강민첨은 백면 서생이지만 마지막 현직도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부상서인 데서 엿보듯 군인 색채가 상당히 강한 직책을 역임하고 실제로 전장터에는 대장군이 되어 활약했다.
웃기는 건 서생이라 그가 활쏘기와 말 타기도 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의지와 기개가 굳고 과단성이 있어서 여러 차례 전투에서의 공을 세워 마침내 현달하게 되었다고 고려사 열전에는 적었다.
백면 서생의 이런 군인화와 그에 따른 눈부신 성공은 결국 누적하는 군인들 불만을 불러 훗날 고려가 막부정권 시대를 개막하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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