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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참을 만큼 참았다, 정면으로 대드는 고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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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이 고려를 침투 타격하는 두 경로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소기한 성과를 내지 못한 거란은 게릴라전법을 채택해 고려를 괴롭히기로 방향을 바꾼다.

이른바 치고빠지기 전법이었으니, 그 동원하는 군사 성격에 따라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고려와 거란이 교통하는 거란 동방기지인 동경유수가 거란군을 소규모로 직접 동원해 고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방법이 있고

둘째 여진을 동원한 간접 타격도 있었으니

둘은 공격 타점도 달랐다.

먼저 동경유수 기점 거란군 타격은 고려 기준으로는 서북면에 집중되었으니, 흥화진을 필두로 하는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집중 타격했다. 

반면 여진을 동원한 타격은 한반도 동해안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그 타격 지점은 지금 기준으로 말하면 강릉과 경주가 타격지였으니, 이쪽이 아무래도 동해안 대도회였던 까닭이다. 

현종 원년 이후 이듬해, 곧 서기 1010~11년 제2차 고려거란전쟁과 훗날 소배압에 의한 1018년 ~ 1019년 최후의 제3차 고려거란전쟁 시기까지 이 기간은 두 나라 관계는 시종 긴장과 간헐적인 소모전이 계속되는 형국이었다.

이 전쟁은 양쪽에 막대한 피로와 피해를 남기게 되는데, 거란 쪽 피해 역시 막대해서, 잦은 징발은 곧 돈을 요구했고, 나아가 이렇다 할 전과도 없는 가운데 인명피해만 늘어갔으니, 이것이 거란의 국력의 소모를 촉진했다고 나는 본다. 

이는 결국 훗날 여진의 힘을 키우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살피기로 한다. 

저 기간, 곧 제2차 고려전쟁과 제3차 고려거란전쟁 사이에서 두 나라는 그래도 외교관계는 지속되어, 그런 대로 외교사절은 갈 데는 가고 올 때는 오는 희한한 관계가 계속된다. 

이 기간 고려는 거란을 아예 버리고 그 대안으로 송을 선택하려 일도 있었지만, 문제는 송은 거란을 대적할 힘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연합을 완곡히 거부했다.

결국 고려로서는 혼자 힘으로 버텨 나가는 수밖에 없었으니, 참다참다 분노가 그대로 폭발하기도 했으니 

그것을 상징으로 보여주는 일이 있다. 

현종 7년, 1016년 1월 5일 경술에 거란은 기다렸는 듯이 겨울을 이용해 야율세랑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烈을 앞세워 곽주郭州를 공략한다. 이 전투에서 고려는 성은 지킨 듯하지만 피해가 막대해 전사자만 수 만에 달했다 한다. 

그 나흘 뒤 거란은 사신을 보내지만, 고려는 입국을 거부한다. 이 대목을 고려사절요 해당 항목에서는 갑인일에 거란 사신 10인이 압록강에 이르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보통 고려가 얻어터지면서도 관계 개선에는 지속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아예 태조 왕건 시대로 돌아가 거란을 개취급했기 때문이다.

패권국가 거란이 보낸 사신이 국경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고려는 이제 다시 거란과의 전면전을 선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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