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72권, 27년(1532) 3월 1일 경술 1번째 기사에는 기장機張으로 유배된 생원生員 이종익李宗翼이란 사람이 올린 상소가 실렸으니, 그 내용은 박운朴雲·이행李荇·이항李沆·김극성金克成·조계상曺繼商·유여림兪汝霖을 다시 등용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서 이종익은 임금한테 충성하다가 나중에 억울한 일을 당한 역사상 인물들을 거론했거니와, 그네들 처지를 빌려 임금이 그런 충신들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요지다.
이 상소가 주목할 점은 그 시대 그러한 정당성을 홍보하는 논거로 흔히 중국 역사에서 사례를 빌려오는 일이 허다하지만, 이종익은 유독 한국사상 인물에서 그런 보기를 찾았으니, 이에서 인용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김유신이다.
다만 우리가 유의할 점은 있다. 김유신은 임금한테 충간했다 해서 억울하게 쫓겨난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시종일관해서 권력 중심에 있었고, 갖은 영광을 누리다가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그렇다면 이종익은 도대체 김유신의 무엇으로써 김유신 같은 충신이 핍박받았다고 이야기하는가?
아, 신은 또 김유신金庾信의 일로 다시 논하겠습니다. 김유신은 신라의 김태종金太宗을 도와 동서로 정벌하여 왕국을 안정케 했으니 위대한 업적과 무거운 인망이 고금에 비할 데 없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이 태종의 후손에게 죽임을 당하자, 유신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 같은 것이 홀연히 일어나 곧장 태종의 능陵으로 향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으니 ‘나는 대대로 호국신護國神이 되어 있는데, 이제 내 자손이 죄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나는 이곳을 떠나 다른 데로 가겠다.’ 했으니, 태종이 재삼 달랜 이후에야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이종익이 말하는 이것이 바로 《삼국유사》에서 저록한 미추왕 죽엽군 이야기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데 사뭇 다른 구석이 있다. 이를 살피기 전에 우선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미추왕과 죽엽군[未鄒王竹葉軍]을 우선 본다.
제37대 혜공왕惠恭王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779)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유신공庾信公 무덤에서 일어나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駿馬를 탔는데 그 모양이 장군과 같았다. 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40명가량 군사가 그 뒤를 따라 죽현능竹現陵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능 안에서 무엇인가 진동하고 우는 듯한 소리가 나고, 혹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그 호소하는 말에 이르기를 "신臣은 평생 어려운 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일통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제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보호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난을 구제하는 마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온데 지난 경술庚戌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은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 공렬功烈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먼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서 힘쓰지 않을까 합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의 공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을 어떻게 하겠소. 공은 전과 같이 힘쓰도록 하오"라고 하면서 세 번이나 청해도 세 번 다 듣지 않았다. 이에 회오리바람은 돌아가고 말았다. 혜공왕惠恭王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 이내 대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 김유신공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고 김공을 위해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려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뒤에 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추왕未鄒王의 혼령이 아니었던들 김공의 노여움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미추왕의 나라를 수호한 힘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하여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 일컫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유명하거니와, 나는 언제나 이 일을 접하면서 왜 김유신이 미추왕을 찾아갔을까가 의심이었다. 그런 까닭이 저 이야기 찬자도 궁금했던지 그 까닭은 미추왕이 신라건국시도 박혁거세도 능가하는 대접을 받은 데서 찾는다. 마지막 구절 미추왕릉이 혁거세가 묻힌 오릉보다 서열이 위이며, 그런 까닭에 그의 무덤을 대묘大廟라 일컫는 데서 찾는다.
하지만 나는 김유신과 미추왕의 고리를 찾기는 힘들어 왜 하고 많은 왕 중에서 미추왕을 찾았을까는 늘 의심이었다. 둘은 워낙 멀리 떨어진 이유도 있거니와, 그런 까닭에 직접 인연도 없다. 혈연 역시 가락김씨와 계림김씨로 다르다.
이런 궁금증을 저 이종익李宗翼 상소문은 일거에 푼다. 저에서 분명 이종익은 후손이 억울하게 죽었다 해서 김유신이 호소하러 찾아간 데가 태종무열왕릉이라 한다. 이것이 순리에 맞다.
물론 저 죽엽군은 설화성 짙은 내용이라 역사성을 따지기에는 저어함이 있다 해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세운 일등공신이고, 그의 시대에 그와 더불어 일통삼한 기틀을 마련했으니, 당연히 그가 찾아가서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그가 묻힌 무열왕릉이거나 그의 아들 문무왕릉이어야 한다.
혹자는 저런 상소문은 전고를 엄밀히 따지지 않기에, 기억에만 의존한 이종익이 기억착란을 일으켜 미추왕 대신 태종무열왕을 거론했다 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생평 저런 의문이 있었기에, 저 상소문이 허심하게 보이지 않는다. 합리적 추론은 당연 이종익이 거론한 태종무열왕이다.
이종익의 기억이 착란하지 않았다면 분명 죽은 김유신과 죽은 김춘추 사이에는 저와 같은 일이 있었음을 적기한 다른 계통 문헌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원천으로 《수이전殊異傳》을 지목한다.
저 대목을 주목한 연구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이야기는 매우 주시해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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