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재위 52년 병신(1776) 3월 3일 갑술 술시戌時에 실상 숨을 거두었으니, 그럼에도 공식 발상은 이틀이 지난 5일에야 있었다. 실록에는 이 중차대한 사안 전개에 3월 4일자 기록이 몽땅 누락되었다. 이 점이 나로서는 수상쩍기 짝이 없다. (아래서 말하는 것들은 실록 기준이며, 승정원일기가 다행해 남아있어 이보다는 더 상세하다고 한다. 일기는 내가 미쳐보지 못했다. 기호철 선생 전언에 의한다.)
3일자를 보면 "이때 임금이 잠든 듯하여 오래 가래 소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문 밖에 물러가 엎드렸다. 조금 뒤에 왕세손이 울며 김상복 등에게 말하여 진찰하게 하였는데, 오도형이 진후診候한 뒤에 물러가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脈度가 이미 가망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달리 쓸 약이 없습니다. 한 냥중의 좁쌀 미음을 달여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이어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이 속광屬纊을 청하는 한편 도승지 서유린이 쓴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를 반포할 것을 청했지만, 왕세손은 일단 보류케 한다는 말이 보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3월 5일이 되어 이날 "묘시卯時에 임금이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승하昇遐"한 것으로 반포된다.
왕조시대 실제 사망과 발상은 시점이 보통 다르다. 발상이란 간단히 말해 죽음에 대한 공식 공포다.
이리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반란과 혼란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으니, 이 중요한 정보를 독점한 쪽에서는 혹시라도 있을 반란에 대비하는 한편, 나아가 장례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돗대기시장판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영조의 죽음에 즈음해 조선왕실과 조정은 실로 난처했으니, 훗날 정조라 일컫게 되는 왕세손은 물론이고, 웬간한 원로 조정 대신들도 장례다운 왕의 장례 경험이 없었다.
워낙 영조 자신이 오래살았고, 무엇보다 재위기간이 왕청나게 길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죽었을 때 그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전국 팔도를 통털어 몇 명 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으로서 그 이전 왕의 장례를 직접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발상하면서 왕세손은 이리 말한다.
“황급한 때에는 모든 일이 전도되고 틀리게 되기 쉬우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상고해 보는 것이 옳겠다.”
일이 급해서가 아니라 하도 왕의 죽음이 없었던 까닭에 예제의 나라라고 하는 조선왕조도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죽음에 즈음한 각종 임시기구 설치와 각종 장송의례가 장황히 실록에는 남았으니, 승정원일기 이 무렵 분량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더 복잡다기하게 양상들이 전개되었다.
경험이 없으니 결국 책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례보편을 비롯한 각종 의례서와 의궤가 동원되었다. 그의 죽음과 장송을 둘러싼 정개 양상은 생략하지만, 왕 역시 자주 죽어야 혼란이 덜하다.
그러니 장수왕처럼 80년을 재위하거나, 진평왕처럼 54년을 재위하면 남은 사람들이 돌아버리게 된다.
그건 그렇고 세종 이후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되는 이 위대한 왕이 병들어 헉헉대는 장면들을 중계를 통해 보는 이 못내 씁쓸하기만 하다.
죽음이야말로 신이 내린 가장 공정한 선물 아니겠는가? 그의 죽음이라 해서 어느 농민, 어느 노비의 죽음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건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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