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계묘년癸卯年, 토끼해입니다. 동아시아에서 토끼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꾀 많은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작년에 작고한 이어령李御寧(1933~2022) 선생은 십이지신 중 하나인 토끼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십이지 중 네 번째 동물을 토끼다. 토끼의 한자는 兎 ‘토’다. 그러나 호랑이가 寅 ‘인’자로 표현되듯이 토끼도 卯 ‘묘’자로 표현된다. ‘묘’자에는 만물의 성장·번창·풍요를 뜻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성장·번창·풍요는 특히 농경민족이 향유하는 특성인 동시에 토끼의 속성이기도 하다.
태양도 중요했지만 달이 인류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력은 고대의 농경민족부터 인지해왔고, 그러한 농경민족을 위해 태음력이 생겨났다. 달은 태음력의 상징이며 달의 삭망은 바로 성장·번창·풍요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달과 토끼는 농경민족과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끼는 기교가 뛰어난 성격으로, 살기 위한 통로굴이 하나가 아니다[狡兎三窟]. 사냥꾼이 한 길을 쫓으면 토끼는 다른 길로 도망친다. 또한 뒷발이 길어서 빨리 달리며, 그 특색이 주위의 풀과 흙의 색과 흡사하여 자세히 관찰한 사람은 토끼의 꾀가 여우를 능가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토끼가 희생제물이 되어 병자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승되고 있는데, 이것은 토끼의 덕을 강조한 이야기다.”
그러나 토끼가 주로 산에 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토끼 – 정확히 말해, 케이프 토끼(Cape hare, 학명: Lepus capensis) 혹은 사막 토끼(학명: Lepus aegyptiaca) – 는 사막에 서식하는 토끼였습니다.
사막환경에 맞게 밝은 갈색 혹은 붉은색 털을 가진 케이프 토끼는 사하라 사막과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와 같은 아프리카 북부와 중부 및 남아프리카의 저지대(Bushveld), 그리고 지금의 이란 • 이라크에 해당하는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 초원에 서식하는 야행성 동물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경우, 선왕조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나카다 3기(Naqada III: 기원전 3200-3000년경)에 제작된 화장판과 같은 유물에서 그 독특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현재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이 소장한 “사냥꾼 화장판”(Hunters Palette: EA02790)이라는 이름이 붙은 화장판의 오른쪽 상단에는 일렬로 늘어선 선사시대 사냥꾼들의 발치에 이들을 피해 도망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아래 관련 사이트 (1) 참조).
관련 사이트 (1):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20790
중왕국 시대(기원전 2055-1650년)에는 탄산칼슘과 구리 산화물인 공작석(malachite), 그리고 이산화규소(silica) 등의 재료를 혼합하여 소성(燒成) 가공한 파이앙스(faience)를 소재로 한 토끼 모양의 호부(護符: amulet)가 귀족의 분묘에 종종 부장되었습니다(아래 관련 사이트 (2) 참조).
직사각형 받침대 위에 형상화한 토끼가 어떤 이유로 고대 이집트인들 부장품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발정기 없이 수시로 교미하는 토끼의 놀라운 번식력이 사후 부활과 영생의 바람과 결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관련 사이트 (2):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20853
이집트인들이 사막지대에서 사냥한 영양이나 하이에나 같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토끼 역시 인기 있는 ‘지비에’(gibier) 요리 재료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신왕국시대 제18 왕조(기원전 1550-1295년)부터는 토끼가 여러 공물 중 하나로 망자에게 제공되는 모습이 분묘 벽화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영국박물관의 유명한 고대 이집트 벽화 중 하나인 넵아문(Nebamun) 벽화에는 망자를 위한 장례공물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밀·보리·야채와 함께 영양과 토끼를 들고 행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아래 그림 참조).
고대 이집트인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토끼 역시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 중부 헤르모폴리스(Hermopolis)에서는 “재빠르신 이”(Swift One)를 뜻하는 웨누트(Wenut) 여신이 이 도시 주신인 토트(Thoth)와 함께 숭배되었습니다(앞 상형문자 참조).
웨누트 여신은 여성 몸에 토끼 얼굴을 한 모습으로 표상되었는데 후기왕조 시대(기원전 664-332년)와 그리스 지배기(기원전 332-30년)에는 웨누트 여신을 상징하는 토끼의 청동상과 소형 파이앙스 호부가 다수 제작되어 당시 성행한 동물숭배와 함께 여신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끝으로 상형문자 체계에서 “토끼” 기호는 길고 넓은 귀와 수염을 가진 토끼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합니다.
앉아 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은 토끼는 언제라도 “토낄,” 즉 도망갈 태세입니다.
역설적으로 sẖat “토끼”라는 개별 단어는 문헌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집트 중부 베니 하산(Beni Hasan) 귀족 분묘 벽화에서 토끼 형상 위에 이 단어가 표제(caption)로 기입된 사례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 기호는 2자음문자로서 음가가 wn “웬”이기 때문에 wnj “서두르다”를 비롯하여 이 음가가 포함된 다양한 단어에서 표음문자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상형문자를 우의적으로 해석한 『히에로글리피카』(Hieroglyphica) 저자인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신관 호라폴론(Horapollon: 기원후 5세기)은 토끼가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wn “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는 “이 동물이 언제나 눈을 열어놓고 – 즉, 뜨고 –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I, 26)
이는 생물학적으로도 문헌학적으로도 틀린 설명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토끼” 문자가 2자음동사 wn “열다”에 사용된 이유는 단지 우연의 일치로 문자의 음가가 해당 동사의 그것과 동일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호라폴론이 이 단어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이를 통해 일부 성각문자 의미가 로마시대 신관들에게 소실되지 않고 전승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페친 여러분, 2023년 계묘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세기 탑골공원의 '폭소클럽' 백탑파白塔派 (0) | 2023.01.03 |
---|---|
영조의 죽음, 왕은 자주 죽어야 혼란이 덜하다 (0) | 2023.01.03 |
영분榮墳, 출세는 조상 음덕 (0) | 2023.01.02 |
사가정 서거정이 증언하는 15세기 도봉산 영국사 (1) | 2023.01.01 |
사가정 서거정이 증언하는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 (1) | 2023.0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