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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대심리에서 찾은 삼국시대 고분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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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성림문화재연구원이 작성한 《예천 대심리 도시계획도로(소로3-71호)개설부지 내 유적 문화재 발굴조사 전문가검토회의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한 보도가 경북일보에서 있었으니, 나는 이 보도를 통해 이런 발굴소식을 알았다. 

 

  • 예천군청사 뒤편 얕은 동산 일원, 원삼국·삼국시대 고분 발견
  • 목곽묘·매납 유구·석실묘 발견…경북북부 첫 사로국 양식 '눈길'
  • 이상만 기자 승인 2020년 09월 03일 20시 06분  지면게재일 2020년 09월 04일 금요일 13면

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51794

 

예천군청사 뒤편 얕은 동산 일원, 원삼국·삼국시대 고분 발견 - 경북일보 - 굿데이 굿뉴스

원삼국·삼국시대 예천지역 중심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발견돼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발견된 곳은 예천읍 대심리 497번지 일원으로 군신청사 뒤편 얕은 동산이다. 군에서 도로개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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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대심리 도시계획도로(소로3-71호) 개설부지에 포함된 예천읍 대심리 497번지 일원 274㎡를 예천군 도시과 의뢰로 성림문화재연구원이 7월 21일 이래 조사한 결과 "원삼국시대 목곽묘 1기, 삼국시대 고분 2기가 확인"하는 한편 "개·이단투창고배·단경호·대부장경호·파수부배·연질옹·금제이식 연결고리·불명 금동제 편·추정 갑옷·철부·관정 등" 50여 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습했다.  

북쪽에 위치한 봉덕산(373.6m)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부에 위치하는 이 지역은 삼국시대 예천읍 중심고분인 대심리고분군Ⅱ에 해당한다. 

 

 

 

 

1. 원삼국시대 1호 목곽묘 

이른바 원삼국시대(난 이 표현 용납하지 않지만 조사단 용어를 빌린다) 무덤이라는 1호 목곽묘는 ‘U’자형 굴광 기준으로 길이 350㎝, 너비 100㎝, 목곽 길이 310㎝, 너비 60㎝지만  목관은 범위가 확인되지 않았다. 주축방향은 N-39°-W로 등고선 방향과 평행한다.

유물은 북서쪽 단면 부장 칸에 승문타날 단경호 5점이 정치된 채로 확인되었으며, 상부에는 단경호 1점과 추정 갑옷 1점이 놓여 있었다. 남동쪽 보강토에서는 환두대도 1점, 철부 2점, 철모 2점, 철촉군 등을 부장한 양상이 드러났다.

이상 원삼국시대 1호 목곽묘

 

2. 삼국시대 1호 석실묘

삼국시대고분 중 1호 석실묘로 명명한 곳은 도굴과 경작지 활용 등으로 파괴가 극심했다. 동쪽 인점지점에 앞서 본 원삼국시대 1호 목곽묘가 있고, 북서쪽에는 뒤에서 살필 다른 삼국시대 무덤인 2호 석실분과 잇닿은 모습이다.  

봉분은 대부분 유실된 채 그 외곽을 따라 빙 두른 배수구 관련 시설인 주구周溝가 드러났다. 이 주구로 볼 때 이 무덤은 봉분 기준으로 평면 타원형이며, 규모는 길이 21m, 너비 16m 정도다. 특이한 점은 봉토 안 남서쪽 지점에 옹관묘 1기가 배장묘로 조성되었으며, 봉토 서쪽과 북서쪽에 위치한 2기 매납유구에서는 단경호가 정치된 채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사전
조사중 

 

매납유구라는 표현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 확실치는 아니 하나, 시신을 묻은 곳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묻은 흔적이라는 뜻인 듯하다. 

시신을 안치하는 핵심 공간인 이른바 매장주체부는 별도 진입시설 없이 그냥 외부로 통하는 문만 설치한 횡구식橫口式 석실묘石室墓로,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성된 N-53°-W이며, 평면 장방형에 가깝다. "길이 11.5m, 너비 7m이며, 매장주체부는 길이 8.5m, 너비 1.5m다"라 조사단에서는 표현했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했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길이 11.5m, 너비 7m"는 석실을 안치하고자 판 구덩이인 묘광墓壙을 말하는 듯하고, "길이 8.5m, 너비 1.5m"는 석실이 아닌가 하는데, 자신은 없다. 

개석

 

아래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시상대屍床臺가 1m의 깊이로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표면에서 1미터 깊이에서 시상대가 확인되었다는 뜻 같다. 시상대란 시신을 넣은 관을 안치하는 받침 시설이다. "단면조사 결과, 최소 2차례에 걸쳐서 추가장이 이뤄진 것으로 판단되며, 각 시상대 단면상에서 뚜껑 및 철검 등의 철기유물이 확인되었다. 현재 시상대는 순차적으로 조사 진행 중에 있다"고 했거니와, 그 조사 결과가 저 경북일도 보도에 인용된 듯하다. 

석실 벽체는 지름 40∼60㎝가량 되는 깬돌을 사용해 "대부분 횡평적으로 내경하게 쌓았으며, 벽석과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즙석시설을 2m 가량의 폭으로 둘렸다"고 하는데, 꼭 이런 표현을 쓰야만 하는지는 제끼기로 하고, 암튼 깬돌을 뉘여서 쌓되, 안쪽으로 기울어지게끔 했다는 뜻이다. 

시상

 

"시상屍床은 편평한 할석割石 위에 잔자갈을 깐 최후 시상대가 중앙부에만 부분적으로 확인되며, 상단부 및 하단부는 교란되어 앞 시기 시상의 잔자갈돌이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선뜻 와 닿는 말이 아니다. 

출입시설인 "횡구부橫口部는 남동쪽 단면에 연連하여 반원형으로 확인되었다"고 하며 그 "폐쇄석은 2열로 나타났으며, 추가장 과정에서 높이 차를 두면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뭐 알아서 새겨들었으면 한다. 

토층

 

"유물은 최후 시상대에서는 도굴로 인해 거의 유존하지 않았으며, 중앙부에서 불명 금동제 편 1점만이 출토되었다. 2차 시상대는 1차 시상대 상부에 크기 60㎝내외의 대형 할석을 채워 넣은 후 상부에 잔자갈을 깔아 시상대를 마련하였다. 조사결과 2차 시상대에서는 행엽과 금동제편, 철촉편, 영락으로 추정되는 청동제편이 수습되었다. 1차 시상은 현재 조사 진행 중에 있으며, 내부에는 일단투창고배, 대각도치형 뚜껑, 장경호 및 재갈, 철촉, 운주 등의 유물이 현재 확인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건 뭐 조사보고서를 기다려 봐야겠다. 

유물 출토상황. 이상은 삼국시대 1호 석실분

암튼 이를 보면 3차에 걸쳐 시기를 달리하는 매장이 있었다는 뜻이다. 최초로 누군가가 죽어 이 무덤이 만들어지고, 그 다음 또 누가 문을 따고 들어가서 묻히고, 다시 그 이후 어느 시점에 어떤 사람이 죽어 또 다시 문을 따고 들어가 잤다는 뜻이다. 

시상대라 이처럼 1~3차로 구분되는 사례가 있는지 궁금하거니와, 납득이 쉽지 않은 대목도 있다. 

벽석 세부
봉토 토층
주구토층

 

주구 전경

 

3. 삼국시대 1호 옹관묘

이 삼국시대 1호 석실묘 배장묘라고 판단한 1호 옹관묘는 길이 103㎝, 너비 56㎝라 하는데, 이것이 옹관 전체 규모를 말하는지, 아니면 이런 옹관을 묻고자 판 구덩이를 말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주옹主甕(간단히 말해 큰놈이다)은 대호大壺, 막음옹(마개용)은 연질옹軟質甕을 사용했다 한다. 주축방향은 N-30˚-W으로 등고선 방향과 평행하댄다.

주옹인 대호는 완형이 아닌 파손품을 사용했다 하는데 옹관 내부에서 특별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댄다. 다 파먹었나?  

삼국시대 1호 옹관묘



4. 삼국시대 매납유구 2기 

(1) 1호 매납유구 

삼국시대 1호 석실분 서쪽 봉토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평면 장방형이다. 길이 135㎝, 너비 68㎝, 깊이 34㎝이며, 주축방향은 N-1˚-W. 타날문 단경호 3점이 정치한 채 남북 방향으로 발견됐다. 동쪽 장벽 직하에서는 단경호 1점이 매납된 상태였다. 단경호 주변 내부 흙에서 씨앗이 확인된다는데 무슨 씨앗인지는 모르겠다. 

1호 매납유구



(2) 2호 매납유구 

삼국시대 1호 석실분 남서쪽 봉토 안에 위치한다. 평면 원형에 가까우며 길이 68㎝, 너비 66㎝, 깊이 21㎝에 주축방향은 N-15˚-W. 1호 매납유구와 마찬가지로 내부에 갈색사질점토가 단일층으로 퇴적된 상태이며 바닥면은 대체로 편평. 타날문 단경호 1점이 옆으로 누운 상태로 발견됐다.  

2호 매납유구



5. 삼국시대 2호 석실분 

남동쪽으로 삼국시대 1호 석실분과 인접한다. 

삼국시대 2호 석실분

 

봉분 대부분은 유실된 상태, 석실 벽체는 장방형이다. 1호 석실분 북서쪽 봉토 일부를 파괴하고 만든 점으로 보아 1호분보다는 늦게 만든 무덤이다. 봉토 외곽으로 1호 석실분 주구와 연결되는 주구를 만들었으니 여러 모로 1호 석실분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분명하다. 봉토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까우며, 추정규모 지름 13m가량. 

1호 석실분과 같이 매장주체부는 횡구식석실묘이며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한 N-51°-W다. 장방형인 석실(혹은 묘광)은 길이 260㎝, 너비 137㎝.

2호 석실분
2호 석실분 유물 노출

 

석실 벽체는 지름 20∼40㎝ 크기인 깬돌을 이용해 대부분 횡평적으로 축조했단다. 시상은 바닥에다가 편평한 깬돌을 깐 후 상부에 지름 5㎝ 안팎인 잔자갈을 올렸다. 출입시설에 3개 폐쇄석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 두 차례 이상 추가장이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횡구부는 북서쪽 단벽에 연하여 반원형으로 확인된다. 총 3열이 확인된 폐쇄석은 "추가장 과정에서 높이 차를 두면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글쎄, 폐쇄석이 3개라고 3차까지 장송이 있었다??? 

북서쪽 단벽에 개·고배·단경호·대부장경호·파수부배·철도·관정 등 약 30여점 유물이 수습됐다.

2호 석실분 횡구부 토층

 

<조사지역 유구 현황표>

시대

유구명

유구번호

크기(㎝)

주축방향

출토유물

비고

길이

너비

깊이

원삼국

목곽묘

1

350

100

72

N-39˚-W

단경호 6, 추정 갑옷1

 

삼국

1호분

석실묘

1

850

150

137

N-53˚-W

불명 금동제편1

 

옹관묘

1

103

56

23

N-30˚-W

대호1, 연질옹1

 

매납유구

1

135

68

34

N-1˚-W

단경호4

 

2

68

66

21

N-15˚-W

단경호1

 

2호분

석실묘

2

260

137

27

N-51˚-W

개,고배,단경호,대부장경호,파수부배,철도,관정 등

 

 

조사단이 제출한 의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전문 전재한다. 

예천 대심리 도시계획도로(소로3-71호)개설부지 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및 조사단 의견은 다음과 같다.

조사지역은 봉덕산(373.6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가지능선부에 해당하는 지형으로 예천의 중심 고분인 대심리 고분군Ⅱ에 속한다. 조사는 봉토를 확인하기 위해 허가받은 면적(274㎡)에서 북동쪽과 남서쪽으로 추가로 범위를 확장하였다.

조사결과, 원삼국시대 목곽묘 1기와 연접된 삼국시대 고분 2기가 확인·조사되었다. 목곽묘 내에서는 승문타날단경호와 추정 갑옷이 출토되었으며, 유물로 본 목곽묘의 연대는 3세기 말엽~4세기 초엽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 고분은 추정 봉토 규모가 길이 21m, 너비 16m 가량인 1호분의 북서쪽에 덧대어 2호분이 축조된 양상이다. 1호분 내에서는 배장묘인 옹관묘 1기와 2기의 매납유구가 확인되었으며, 매장주체부는 횡구식석실묘이다.

매장주체부의 시상 교란부 단면 양상으로 보아 상·하 시상을 3차례 정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최후 시상대의 유물은 모두 도굴되어 마지막 사용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특징적으로 벽석의 주변으로 벽석 및 봉토를 보호하기 위한 즙석시설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안동 탑리 및 조탑동 고분군 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2호분은 직경 13m가량의 원형분으로 추정되며, 매장주체부는 횡구식석실묘이다. 유물로 본 최종 사용 시기는 6세기 초엽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은 약 50여점으로 개·이단투창고배·단경호·대부장경호·파수부배·연질옹·금제이식 연결고리·불명 금동제 편·추정 갑옷·철부·관정 등이 수습되었다.

이상 예천 대심리 도시계획도로(소로3-71호)개설부지 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조사지역 일대는 원삼국시대~삼국시대에 걸쳐 예천의 중심 고분군으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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