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성리학은 예학으로 특징지을 수 있지 않을까.
성리철학에 대한 이해가 끝난 조선의 유학자들은
예학으로 달려갔다.
정확히는 고대 이후 망실되었다는 고례의 복원을 위해서였다.
삼년상이니 친영례니 이런 유교 의례는 원래 조선에는 없었고
중국도 사라진 고례가 많았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꾼 조선유학자들은 고례의 복원을 열망했는데
이에 따라 조선사회를 고례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지만
문제는 고례가 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되겠다.
이런 때 지남의 역할을 한 것은 결국 주자가례와 유교 텍스트로서
주자가례에 자세히 적힌 것은 그대로 따라 하되
여기도 남아 있지 않은 고례는
남아있는 경전(주로 예기)의 편린에 따라 하나씩 조각을 맞추어갔다.
그렇게 완성된 것이 조선의 의례다.
조선이 복원한 고례는 정확히 말하면 중국의 의례가 아니고,
조선후기에 유학자들이 머리로 짜내 최대한 근거를 갖춰 복원하고자 한 상상의 산물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신봉되고 있는 것이라도 조선에서는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아
그런 예로 가장 적당한 사례가 바로 임란 이후 관왕묘 도입에 관한 논란이 되겠다.
조선에서 느닷없이 선교사 하나 없이 교회가 출현한 이유는
조선의 유학자, 성리학자들이 텍스트로 고례를 복원하는 일에 능숙했기 때문이다.
자세하지 않아도 고례의 편린이 있으면 여기에 논리와 근거를 어떻게든 붙여서
상상의 산물일지언정 고례를 복원해 냈다는 말이다.
선교사 없는 조선 교회의 출현은 조선후기 예학의 산물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례를 텍스트 몇 줄로 복원해 낸 유학자들에게 있어
비교적 자세한 기술이 텍스트로 전해진 천주교 교회를 하나 만들어 내는 것쯤은
그렇게 대단한 공덕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던 셈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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