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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반, 아마도 76년 무렵으로 기억하거니와 당시 서울대박물관에서 석촌동 발굴조사를 했다.
3호분인가 4호분을 배기동 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님이 팠다.
그 무덤앞 아마도 조선시대로 치면 정자각 같은 제사 부속 건물이 있었다.
거기에서 한성백제시대 와당 1점이 튀어나왔다.
크기는 손바닥만하고, 거기에는 생판 보도 듣도 못한 문양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성백제에 기와?
개소리였다.
더구나 와당?
역시 개소리였다.
배기동 선생이 당시 보고서에다가 이 와당을 소개하기를
이형토기異形土器
라 큼지막하게 썼다.
나는 선생님 만나면 지금도 이걸 갖고 놀린다.
"와당도 모르는 양반이 무슨 선생질하세요?"
그때마다 선생은 시대의 한계를 논하지만 어쩌리오. 이것이 숙명인 것을...
그래서인가?
한때 백제고고학을 꿈꾸던 선생은 저 멀리 구석기로 도망가 버렸다.
구석기 제자 하나 키워본다 했는데 그 제자는 쓰라는 박사논문은 안쓰고 지금 연천가서 관장질한다.
***
저 글을 초한 때가 2016년 1월 21일, 6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제자 털보는 여전히 같은 전곡선사박물관 관장질한다.
질긴 친구다.
우리는 이 털보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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