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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완서浣西 이조연李祖淵(1843-1884)의 글씨

by taeshik.kim 2024.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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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를 보다 보면, 기회가 없지 않았고 그걸 붙잡을 인재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차고 인재를 허무하게 날리는 일을 여럿 접하게 된다.

결과론이지만, 적어도 그렇게 사라지지 않았던들 조선이라는 나라의 마지막이 그랬을까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이조연이라는 사람도 그 반열에 들 만 하지 않을까.

명문 연안이씨였지만 서얼 출신이었던 그는 개화에 일찍 눈뜬 인사였다.

개항이 갓 이루어진 1880년대, 일본과 청나라를 두 차례씩이나 다녀왔고 친군영좌감독親軍營左監督(左營使),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 기계국총판機械局總辦,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總辦, 이조참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같은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었다.

시에도 능했던 이조연은 시회에서 세 살 아래 김가진(1846-1922)을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는데, 한 연구자는 김가진의 사상적 스승이 이조연이었다고까지 말한다(신동준, <개화파 열전>).

이조연의 사람됨은 <매천야록>에 실린 이 일화가 단적으로 보여준다.


계미년(1883) 봄에 그는 윤태준(1839-1884)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갔다. 어느 날 밤에 그가 밖을 나가 보니 길가에 돈주머니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져와서 그 전대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 보았다. 그것은 영국인 아무개의 물건이었는데, 지폐가 그 안에 가득하니 그 가치가 백만 냥쯤 되어 보였다.

그는 잠자고 있는 윤태준을 깨워 “이것을 가지고 가면 조선의 부자가 될 것인데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윤태준은, “자네 뜻대로 하게”라고 하였다.


이조연은 밤에 누웠다 앉았다 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날이 밝자 문 위에 「어젯밤에 지폐 몇천 원을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기 바라오」라는 방을 걸어 놓았다.

그때 어떤 영국인이 찾아와서 크게 놀라며, “내가 듣기로는 동양에는 인물이 적다고 하던데 공처럼 훌륭한 분도 계십니까?”라고 한 후 사례금을 후하게 주면서, “이것은 사례로 드리는 것이니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미 그 사실을 기록하여 신문에 게재하였으므로 조선의 이조연은 하루 사이 온 천하에 알려졌다. 


실제로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자림서보> 같은 영자신문에 이런 기사가 있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겠지만,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이 드물다던 그 매천이 이 정도로 썼다면 극찬에 가깝다 하겠다.

하지만 그의 출세가도는 5년을 넘지 못했다.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정변 주도세력은 청나라와 가깝다는 이유로 그를 죽인다.

수신사 종사관으로 두 번 일본에도 다녀오고 박규수(1807-1877) 문하에 드나들기도 했으니 이른바 개화파와 안면도 있었지만, 그것도 그의 목숨을 구하진 못했다.

이 땅에서 개화 관료 하나가 그렇게 사라졌다.

그의 글씨는 <근묵>에 실린 간찰 정도가 알려져 있었는데, 요즘 간혹 반절 내리닫이 작품이 보이곤 한다.

아마 그가 수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1880년 또는 1881년에 일본인들의 요청을 받고 써주었던 것이 한국에 돌아오는 모양이다.

이 작품도 그런 사례이다(보여주신 소장자께 감사드린다).

솔직히 잘 쓴 글씨는 아니다.

균형감이 덜하고 획의 움직임도 어쩐지 좀 서툴러보인다.

그렇다고 또 호방함으로 그걸 덮은 것도 아니다.

전문 서가의 글씨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의외인데, 마지막에 자기 이름 끝글자 연못 연淵의 획을 기~~ㄹ게 늘인 게 시그니처랄까 독특한 맛은 있다.

당나라 왕유(699-759)의 유명한 시 <녹채>를 썼는데, 볕 경景자를 밝을 소昭로 바꿔 썼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외워 쓰다가 헷갈리셨을까?

空山不見人  빈 산에 사람일랑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단지 사람 말소리만 들리는데
返昭入深林  저녁 빛이 깊은 숲에 들어와
復照青苔上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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