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 사랑은 장모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데, 고려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군주 문종文宗(1019~1083, 재위 1046~1083)은 그렇지 못했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순종順宗(1047~1083, 재위 1083년 7~10월) 후비 선희왕후宣禧王后 김씨金氏 조를 보자. 순종은 문종 아들이다.
선희왕후 김씨는 경주인慶州人으로 대경大卿 김양검金良儉의 딸이다. 순종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궁에 뽑혀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문종文宗이 미워하여 칙서[勑]를 내려 궁궐 바깥의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그런 까닭으로 끝내 자식이 없었다.
연복궁주延福宮主라 불리었고, 인종仁宗 4년(1126) 2월에 죽자 선희왕후라고 추시追諡하였다.
태자가 좋아해서 들인 아내를 시아버지는 용납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기에 쫓아내기까지 했을까.
순종은 세 명의 후비가 있었는데 하나는 종실 평양공平壤公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 왕씨王氏였고 하나는 즉위한 뒤 맞아들인 인주이씨 이호李顥의 딸(그 유명한 이자겸李資謙의 누이) 장경궁주長慶宮主 이씨였다.
평양공 왕기王基(1021~1069)는 현종의 막내아들이므로, 정의왕후 왕씨는 부계로 순종과 사촌지간이 된다.
그래서 순종이 소박을 놓고 다른 여자 김씨를 좋아했던 걸까?
하지만 문종은 자신의 친동생이자, 형수(덕종비 효사왕후孝思王后)의 오빠인 평양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문종은 예순여섯 살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순종은 즉위하고 100일도 못 채우고 죽고 말았다. 그러니 김씨는 제대로 왕태자비, 왕후로서의 권위를 누려보지도 못한 셈이다.
그 한을 품고, 김씨는 남편이 죽은지 43년이 지나서 세상을 하직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제서야 드디어 "총애를 받았던" 남편과 함께 하게 된다. 죽은지 4년이 지나고서 그의 신주가 남편 곁에 놓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인종〉 8년(1130) 4월, 해당 관청에 명하여 태묘太廟에서 체제禘祭를 지내고 순종과 함께 부묘祔廟하도록 하였다. 인종 18년(1140) 4월에는 시호에 공의恭懿를 더하였고, 고종高宗 40년(1253) 10월에는 화순和順을 덧붙였다.
여담인데, 순종이 즉위하고 혼인한 장경궁주 이씨는 100일도 안 되어 과부가 되었다. 아마도 한창 나이였을 이씨, 그래서 그는 SP를 구해 즐겼다. 그 댓가는 비극이었다.
장경궁주 이씨는 인주인仁州人으로 호부낭중戶部郞中 이호의 딸이다. 순종이 즉위하자 맞이하여 비妃로 삼았으나 왕이 훙서하고 나서 외궁外宮에 있으면서 궁궐의 종과 더불어 통通하다가 일이 들통나서 폐廢해졌다.
*** Editor's Note ***
필자가 말하는 고려 순종順宗은 제12대 국왕으로 풀네임은 왕훈王勳이다. 어릴 적 이름은 왕휴王烋, 순종順宗은 종묘에 모시는 신주 이름이다. 문종과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 사이에서 난 맏아들로 아버지 뒤를 이어 즉위했지만 1년 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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