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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일본에서 쓴 유길준이라는 인물의 필적

by taeshik.kim 2024.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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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의 시대, 별처럼 빛날 수 있던 선각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아예 빛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스러졌거나, 초신성마냥 잠깐 반짝이고 사라질 뿐이었다.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1856-1914), 그도 분명 선각자였다.

재동 백송 그늘 아래에서 배운 개화파였던 그는 당시 조선의 누구보다도 세계가 돌아가는 정세에 밝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저술을 남겼고, 잠깐이나마 경륜을 펼칠 기회도 얻었으니 다른 이에 비하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때문에 친일파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만은 않게 되었으니 역사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작 작위를 반납한 덕인지 <친일인명사전>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서유견문西遊見聞>, 일본과 미국 유학, 조선 중립화론, 갑오개혁의 선봉장, 일본 망명과 귀국, 한성부민회 회장....으로 요약되는 그의 삶과 사상,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에 관해서는 여러 어른들이 숱한 연구를 남겼으니 여기서 다시 말할 것은 없지 싶다.

다만 예전에 그의 전기에서 읽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만을 적어놓으려 한다.

만년의 유길준은 노량진 언덕배기에 살았다. 정조의 화성능행도에도 나오는 용양봉저정龍驤鳳䎝亭을 고종이 그에게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노량진은 한강 이쪽과 저쪽을 잇는 나루터로, 당연히 나룻배를 모는 사공이 많았다. 유길준은 그들과도 꽤 허물없이 지냈던 모양인데, 하루는 그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들 벌이가 이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네. 그러니 앞으로 하루에 5전씩 저금을 하게!"

술 마시는 게 낙인 뱃사공들, 하루에만도 몇 번씩 손님을 실어나르는데 밥줄이 끊기겠냐 생각하고 대강 넘겼다고 한다.

그러고 몇 년이나 지났을까, 그 넓은 한강에 다리가 놓이는 게 아닌가!

그런 유길준은 두 차례 일본에 머무를 때가 있었다.

1881년 조사시찰단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에 입학, 1년간 공부한 게 첫 번째였다. 이때 그는 일본어를 터득하고, 게이오에서 가르치던 서양 학문의 맛을 본다.

두 번째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 개화파 내각이 무너지면서였다. 내부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진두지휘했고 특히 단발령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그에게 민중이 가진 반감은 대단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내린 왕명으로 김홍집金弘集(1842~1896), 어윤중魚允中(1848~1896) 같은 대신들이 잡혀 죽임을 당하던 시절, 유길준은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그리고 약 10년간의 망명생활을 이어간다.

아마 그 두 번째 일본 생활 당시 남기지 않았을까 싶은 글씨 한 폭을 구경하게 되었다. 예전에도 몇 번 말했는데 타국에서 어렵게 살아가던 개화기 조선 지식인들은 그들을 도와주는 이에게 서화를 선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도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데, 글씨도 글씨려니와 그 내용이 잔잔히 가슴에 다가와서 한 번 소개해보고자 한다(인상비평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 부탁드린다).

재미있게도 이 시절 개화 지식인의 글씨는 운필運筆이 비슷하게 나온다. 이 작품도 언뜻 보면 현현거사玄玄居士 박영효朴泳孝(1861~1939)의 솜씨인가 싶을 정도이다(박영효의 글씨보다 획의 구성은 세련되지마는).

그 기질이나 성격의 비슷함 때문일 수도 있지만, 손에 쥔 붓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 작품을 보면 유달리 비백飛白이 많다. 비교적 되게 간 먹물에 뻣뻣한 털붓을 썼다는 이야기다.

이런 붓은 일본에서 유행했다는데, 끌린 기가 남는 이런 붓을 쥐고 종이 위에서 움직이려면 팔에 힘을 평소보다 더 주고 많이 옮겨야 한다. 자연히 글씨 획은 과장되고 글자에 호방한 느낌이 강해진다. 그래서가 아닐까-물론 이건 추측일 따름이다.

조선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았을 붓으로도 능숙하게, 유길준은 오언절구 한 수를 내려 썼다. 어디에 나오는 시인가 싶어 이리저리 DB를 찾아보았는데 없는 걸 보면, 아마 자작시인듯 하다.

그런데 그 내용이 처연도 하다. 망명지에서 겨울비를 맞듯 마음이 스산했던 자기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읊었기 때문일까.

부성浮城의 뜻을 일본어 사전에서는 '군함'이라고 풀었는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지명이 아닌가 싶다.

추울 제 부성에 왔더니만         浮城來寒時
열에 아홉 번은 비가 왔네        十出九帶雨
주인이 나한테 말하기를           主人爲余言
봄날 개면 꽃이 나무 가득하리 春晴花滿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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