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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왜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이색을 개망신 주었는가?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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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초상

 
역성혁명에 동참도, 동의도 못한 목은 이색은 충신의 길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신왕조 개창에 죽음으로 저항할 수 있었지만 그는 나약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성계에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막중해 이미 당대에 유학의 종장, 오야붕으로 통했다.

역성혁명 무렵 이색을 죽이라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이성계가 죽일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이었다.

죽여서 골치 아픈 지식인 한 명 처단하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명분이 약했다.

여진족에 다름 없는 성계는 찬탈이란 오명을 두려워했다. 그 찬탈을 선양으로 미화하려면 목은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목은은 거부했다. 실로 소극적이었지만 그는 결코 찬동하지 않았다.

이런 그는 씁쓸히 고려가 패망하는 장면을 목도하고는 4년인가를 더 살다 생을 마감한다.

태조실록 목은 졸기를 보았는가? 사람을 이리도 조롱할 수는 없다.

그 졸기에 왜 목은이 중국어 실력 개판이라 나하추에 빗대어 주원장한테 개망신을 당한 사건을 굳이 넣었겠는가?

이 왜를 생각하지 않고 이 왜를 묻지 않는 역사는 눈뜬 당달봉사다.

한데 아무도 이 왜 why 를 묻지 않았다.

왜?

하필 조선의 이데올로그들은 목은 졸기에 나하추 운운을 넣었던가? (2016.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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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졸기에 나오는 나하추 중국어 운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 가능하다.

첫째 그가 중국 유학파라 해도 이색 중국어가 애초 시원치 않았다. 둘째, 주원장은 남방 출신이라 요즘 기준으로 광동어가 모국어라 북경 일대 중국어는 알아듣지 못했다.     
 
태조실록을 보면 태조 2년 1월 21일 정묘에 이색李穡이 와서 임금을 알현하고는 용서해 준 은혜를 사례謝禮했다 해서 이상한 행적을 보이지만,

그 4년, 1395년 11월 7일 정묘에는 도평의사사에서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한테 미두米豆 1백 석을 보냈지만 받지 않았다 해서 상반한 모습을 보인다.

다시 그해 11월 24일 갑신에는 한산군 이색이 오대산五臺山에서 돌아왔다 하면서, 당초에 이색이 외방으로 버림을 받았다가 종편從便하라는 은총을 입어 관동 지방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에 가서 거기에서 살다가 이성계가 부르니 왔다하면서 임금이 친구의 예로 접대하고 조용하게 담화를 하고 술을 마시고 즐기고는 나갈 때는 중문까지 마중했다 한다. 

나아가 그 이별에 대한 후속 조치로 대략 보름 정도가 지난 같은해 12월 8일 정유에는 이성계가 이색한테 쌀과 콩 1백 곡斛을 내려 주고, 또 술과 고기를 주었다고 하면서 "경은 이미 늙었으니 다시 술과 고기를 먹고 건강을 유지하게 하시오"라 당부하니 이는 이색이 불교를 신봉하여 술과 고기를 끊었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고 한다.

또 같은 달 22일 신해에는 이색을 한산백韓山伯을 봉하고 인하여 의성고義成庫·덕천고德泉庫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를 삼았다 하며

다시 그 이튿날에는 이색한테 대[竹]로 만든 요여腰輿를 내려 주었다 하고

다시 그 이틀 뒤인 12월 25일 갑인에는 다시 이색을 부른 듯 판삼사사 정도전을 참예케 한 가운데 잔치를 베풀었다 하는 것 등등으로 보아 
이성계가 무척이나 이색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공을 들였음을 본다. 

하지만 이색은 결코 목숨으로 전 왕조에 충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신왕조에 협력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이른바 소극적 저항을 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어정쩡한 삶을 고되게 꾸려가던 그도 태조 5년 5월 7일 계해에 이승을 하직하는데, 그 졸기는 아래와 같다. 

 
한산백韓山伯 이색李穡이 여흥驪興012)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서 졸하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임금이 조회를 정지하고 치제致祭하였으며, 부의를 내려 주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색穡은 자가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한주韓州013) 사람 정동행중서성 낭중 도첨의찬성사征東行中書省郞中都僉議贊成事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과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과 달랐고, 나이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이곡이 원조元朝014)의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색은 조관의 아들이라 하여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이 되었다.

신묘년(1351) 정월에 곡(穀)이 본국에 돌아와 죽으니,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상제(喪制)를 마치고, 계사년 공민왕이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할 때는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등이 색을 장원으로 뽑았다.

가을에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 장원壯元하였고, 갑오년(1354)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였으며, 전정殿庭에서의 대책對策에서 제2갑甲 제2명으로 합격하였다.

독권관讀券官 참지정사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 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 등 제공諸公이 크게 칭찬하여 칙지로 응봉 한림문자·동지 제고 겸 국사원 편수관應奉翰林文字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고 귀국하자, 공민왕이 전리 정랑典理正郞·예문 응교 겸 춘추 편수藝文應敎兼春秋編修를 더하였다.

이듬해 내사 사인內史舍人에 오르고, 여름에 원나라 서울에 가서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다.

병신년(1356)에 모친이 늙었다 하여 벼슬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와 가을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임명되고, 다시 옮겨서 우부승선(右副承宣)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015) 로 임금을 가까이 한 지가 7년이나 되었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016) 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남행(南行)할 때, 색은 왕의 행행(行幸)에 호종, 도움을 이루어 적을 물리친 뒤에는 훈 1등에 책정되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다.

계묘년에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원나라에서 임명받고, 본국에서는 밀직 제학(密直提學)을 임명받고 단성 보리 공신(端誠保理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정미년에 원나라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으로 제수되고, 본국에서는 판개성 겸 성균 대사성(判開城兼成均大司成)으로 임명되었는데, 한때의 경술(經術)을 통하는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 6, 7인을 천거하여 모두 학관(學官)을 겸했다. 경전을 나누어 수업을 하매 서로 어려운 것을 논란해서 각각 있는 지식을 다했다.

색은 변론하고 분석하며 절충하는 데 저물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억하고 외우기만 하는 습관과 공리(功利)의 학설이 점점 없어지고,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시 일어났다.

기유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으로 더불어 임금에게 청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법을 쓰자고 했는데, 색이 무릇 공거(貢擧)를 주장한 지 네 번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공정함을 탄복했다.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 영전影殿을 짓는데 말할 수 없으리만큼 사치하고 호화롭기가 지극하여,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상서上書하여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노여워하여 유탁을 죽이려 하고, 색을 시켜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리는 교유문을 지으라 했다.

색이 죄명을 임금에게 물으니, 임금이 탁의 네 가지 죄목을 들었다. 색이 대답하였다.

"이것은 죽일 만한 죄가 아닙니다. 원컨대, 깊이 생각하옵소서."

임금이 더욱 노하며 독촉하기를 급히 하였다. 색이 아뢰었다.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글로써 죄를 만들겠습니까?"

임금이 감동되어 깨우쳐 탁이 죽기를 면했다. 

신해년에 모친 상을 만났으나, 이듬해 임금이 기복起復시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삼았는데, 병이 있다고 사면하였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돌아갔다.

색이 병이 중해서 문을 닫고 7, 8년을 지내다가 우왕 8년 임술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고, 무진년에 최영崔瑩이 요동위遼東衛를 공격하자고 청하여, 우왕이 기로耆老와 양부兩府로 하여금 모여서 가부를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서 반대하는 자가 적고 좋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색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랐으나, 물러 나와서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오늘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의리에 거스리는 논의를 했다."

고 하였다.

이 태조가 회군하자 최영을 물리치고 색으로 문하 시중(門下侍中)을 삼았다. 

공민왕이 돌아간 뒤로 부터 〈원나라〉 천자가 번번이 집정 대신(執政大臣)을 들어오라고 해서, 모두 겁을 내고 감히 가지 못했는데, 색이 시중이 되어 폐왕廢王 창昌을 친히 조회하도록 하고, 또 창왕으로 감국監國을 시키도록 하려고 원나라에 들어가기를 자청하여, 드디어 색으로 하여금 하정사賀正使를 삼았다. 그리고 태조가 칭찬하여 말하였다.

"이 노인은 의기가 있다."

색이 생각하기를 태조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지고, 중외가 마음이 돌려져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혹 변란이라도 생길까 염려하여 한 아들을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는 전하殿下017) 로 서장관書狀官을 시켰다. 천자가 원래에 색의 명망을 들었으므로, 인견하고 종용從容하게 하는 말이,

"그대가 원나라 조정에서 벼슬해 한림 학사를 했으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리라."

하니, 색이 당황하여 한어로 대답하기를,

"왕이 친히 조회하려 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뜻을 깨닫지 못학고 묻기를,

"무슨 말이냐?"

하매, 예부의 관원에게 전하여 주달하게 하였다. 색이 오래도록 조회하지 않았으므로 말씨가 대단히 간삽艱澁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대의 한어는 정히 나하추納哈出와 같다."

하였다. 색이 돌아와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의 황제는 마음에 주장하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으로 이것을 물으려니 하면 황제는 묻지 않고, 묻는 바는 모두 내 뜻과는 같지 않더라."

하니, 당시의 논의로 기롱譏弄하기를,

"큰 성인의 도량을 속유俗儒가 어떻게 요량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겨울에 공양왕이 즉위하였는데, 이색은 시론時論에 참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섯 차례나 폄척(貶斥)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자 옛날의 벗이라 하여 용서하니, 태조에게 나아가서 보고 올 때마다 자제들에게 하는 말이,

"참으로 천명을 받은 거룩한 임금님이시다."

하였다. 

또 일찍이 영선(營繕)을 정지하기를 청하고는 물러 나와서 사람들이 묻는 일이 있으면,

"창업하는 임금은 종묘·사직과 궁궐이며 성곽 같은 것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고 했다.

을해년 가을에 관동關東에 관광하기를 청하여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 곳에서 거주하려 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와서 한산백韓山伯을 봉했다. 색이 진현進見하고 하는 말이,

"개국하던 날 어찌 저에게 알리지 않았습니까? 저에게 만일 알렸다면 읍양揖讓하는 예를 베풀어서 더욱 빛났을 것인데, 어찌 마고馬賈018)로 하여금 〈추대하는〉 수석이 되게 하셨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배극렴裵克廉을 가리킨 것이었다. 남은南誾이 〈옆에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 그대 같은 썩은 선비에게 알리겠는가?"

하니, 임금이 은誾을 꾸짖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하고, 옛날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중문까지 나가서 전별하였다. 

뒤에 〈이것을〉 논의하는 자가 있으므로, 남재南在가 색의 아들 이종선李種善을 불러서 하는 말이,

"존공尊公이 광언狂言을 하여 이를 논의하는 자가 있으니, 떠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를 입을 것이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신륵사神勒寺로 피서하기를 청하였는데, 갈 때에 병이 생겼다. 절에 가자 병이 더하니 중이 옆에 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자, 색이 손을 내 흔들면서 하는 말이,

"죽고 사는 이치는 내가 의심하지 않으오."

하고, 말을 마치자 돌아갔다.

색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왔으며,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였다. 사리를 처리하는 데 자상하고 밝아서, 재상이 되어 기성의 법을 따르는 데 힘을 쓰고 복잡하게 고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애를 쓰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만 잡으면 즉시 쓰되 사연이 정밀하고 간절했었다. 문집 55권이 세상에 나왔다. 

집을 위해서는 재산의 유무有無를 묻지 않았으며, 평시에 경솔한 말과 갑자기 노여워하는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연회나 접대를 받는 자리에서도 여유있고 침착하여서 처사하는 데 난번되지 않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었으며 언동은 자연스러웠다. 오랫동안 임금의 은총과 좋은 자리에 있었어도 기뻐하지 않았고, 두 번이나 변란과 불행을 만났으되 슬퍼하지도 않았다. 

늙어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지공 대사指空大師019)와 나옹 대사懶翁大師)020)의 부도浮圖에 명銘을 지었기로, 그 중들이 문하에 내왕해서 불교를 좋아한다는 비평을 받았다.

색이 듣고 하는 말이,

"저들이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복을 기원해 주는데, 내가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하였다. 

색은 아들이 셋 있는데, 맏아들 이종덕李種德과 둘째 아들 이종학李種學은 모두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으나 먼저 죽었고, 셋째 아들 이종선李種善은 지금 병조참의가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2책 9권 6장 B면【국편영인본】 1책 91면
【분류】
인물(人物)

[註 012]여흥(驪興) : 지금의 여주.
[註 013]한주(韓州) : 지금의 한산.
[註 014]원조(元朝) : 원나라.
[註 015]후설(喉舌) : 승지(承旨).
[註 016]경성(京城) : 개성.
[註 017]전하(殿下) : 태종을 말함.
[註 018]마고(馬賈) : 말 장수.
[註 019]지공 대사(指空大師) : 고려 충숙왕 2년에 인도의 마갈타국(摩竭陀國)에서 온 도사(道師). 우리 나라에 와 법화(法化)를 펴고 왕사(王師)가 되었음.
[註 020]나옹 대사(懶翁大師) :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王師). 속성은 아(牙), 호는 나옹. 지공 화상(指空和尙)을 따라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받아 왔음. 지공·무학(無學)과 함께 삼대 화상(三大和尙)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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