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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왜 혁명은 주변부에서 주도하는 위만과 온조를 보면 안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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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변혁의 주체 혹은 동기로서 혁명은 언제나 주변부에서 일어난다. 왜 그런가는 중심부를 차지한 주류는 본능 혹은 생득으로 기존 체제를 옹호하며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까닭이지 무슨 개뼉다귀 같은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이는 중심부로 치고 들어가고자 하는 지역의 욕망을 부채질하는데, 언제까지 이들이 시다바리 총알받이로 만족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모조리 혁명, 그 완성으로서의 새로운 왕조는 주변부 차지였다.

중국 상주商周 이래 처음으로 중국대륙을 대략 700년 만에 통일한 왕조는 서북쪽 변방 진秦이라는 촌놈들이었고, 그를 이어 새로운 권력으로 출현한 유방은 산동성 촌놈이었다. 

수당을 건국한 주체 역시 북쪽 周 계통 유목민 후손들이었다. 다 그렇다. 
 

온조의 이동 경로

 
신라? 어디서 굴러먹다온 개뼉다귀 같은 혁거세가 먹어버렸고 고구려 역시 굴러온 돌 고주몽이 먹었으며 백제 역시 태생 자체가 외래인이라 부여로 치고 들어가서 다 먹어버렸다. 

고려? 듣보잡 왕건이가 지금의 해주 혹은 개성이라는 촌구석을 근거지로 일으켰으며, 견훤 역시 중심부를 치고 들어가지 못하니 저쪽 호남 가서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조선? 이성계는 모국어가 여진어였지 한국어가 아니었던 사람이다. 한국말도 어눌했을 그가 다 먹어버렸다. 

기자조선을 무너뜨린 위만, 백제를 개창한 온조는 총알받이였다.

사기 조선열전에 이르기를 연나라 이주민들을 이끌고 위만이 이르자 조선에서는 서쪽 변경 方 백리 땅을 떼어주고서는 너 거기서 먹고 살아라 하니, 실상 총알받이였다. 

줄 만한 땅이라고는 변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중심부 좋은 땅은 이미 다른 놈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 땅을 떼어준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왔으니 뭔가 먹을 건 줘야겠고 줄 만한 것은 마땅치 않으니 변경 지역 척박한 땅을 주면서 너희들 여기서 먹고 살아라, 총알받이 해라 해서 서쪽 변경 방 백리를 떼어주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위만이 얼마나 열이 받겠는가? 악으로 깡으로!!!

이 정신 발동하며 내실을 키우며 힘을 기르다 이때면 괜찮겠다 싶어 그대로 중심부를 치고 들어가 왕조를 전복해 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혁명을 완성한 것이다. 
 

비류가 정착했다 실패한 미추홀

 
온조? 

온조는 부여에서 주몽과 같이 갈라져 나왔지만, 새로 정착한 땅에서 권력투쟁에 패배했다. 죽거나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떼부자 어머니 모시고, 바리바리 싸들고 나를 따르라 외치면서 멀고먼 남하를 단행했다.

이 어머니 소서노가 희한한데 다름 아닌 아들이 권력투쟁에서 패한 고주몽의 부인이었지만, 조강지처가 찾아옴으로써 버림 받은 비운의 여인이었다. 

모자가 함께 배신감에 분루를 삼키며 이럴 거 같으면 차라리 딴 데 가자 해서 손잡고 내려오다 마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뭐라 했는가? 이 방향이 심각히 달라서 문제인데, 아무튼 마한에서도 기자조선이 위만한테 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우했다. 

마한왕은 제일로 쓸모없는 땅, 동북쪽인가 변경 땅을 떼어주었던 것이다. 왜?

도움이 필요하다 해서 나를 찾아왔는데 돕는 시늉은 해야겠고, 그러자니 쓸 만한 땅은 이미 자기 쫄개들이 다 차지한 마당에 어디 마땅한 자리 없냐 해서 찾아보니 변경 척박한 땅이 남았다.

잘됐다! 기왕 저기도 저놈들 이용해서 개발하고 저들을 살게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서 황무지를 떼어준 것이다. 

한데 이 이주민도 두 갈래가 있었다. 그것을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와 비류로 적었지만, 두 계통이 한꺼번에 혹은 시기 차이를 두고 내려왔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부족이 내려왔다. 

그들이 배치된 곳이 어디인가? 

위치에 논란이 많기는 하겠지만 온조는 한강변 걸핏하면 홍수가 나는 한강변 황무지를 받았고, 비류는 아예 해변가 미추홀 지금의 인천 지역 갯벌 지역을 분양받았다. 온조가 분양받은 땅 역시 방 백리라고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적었다. 

방 백리!!! 변경 황무지!!! 위만이 정착한 과정과 아주 똑같지 아니한가? 이걸 읽어내야 하는데 쓸데없는데다 역사학이 정신을 파는 바람에 한국 역사가 뒤틀어지고 말았다. 

두 집단은 정착과정이 달랐다. 온조는 쑥쑥 잘 커갔는데, 비류는 그만 망했다. 정착에 실패한 것이다. 갈곳 없어진 미추홀 땅 부여 이민들이 자연스럽게 온조로 붙었다.

이렇게 해서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과 서해안을 장악한 마한의 거대 제후국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키운 힘을 바탕으로 이제 중심부를 칠 때가 되었다 해서 마침내 자신을 거둬준 마한왕을 향해 반란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혁명은 완수되었다. 온조는 마한 도성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선포했다. 마지막까지 주근이며 하는 제후들로 복종하지 아니한 친구들은 모조리 처단했다. 

온조왕 시대 마한은 망했다. 다만, 이들한테 중요한 것은 중심부를 치는 것만으로, 또 주근처럼 아예 노골로 반란하지 않는한, 기존 마한 제후들은 각기 나와바리 통치를 용인했다.

왜? 그대로 놔둬도 알아서 공물 바치고 신하를 자처하는데 미쳤다고 위험 감수하며 직접 통치한단 말인가?

직접 통치? 그딴 걸 왜 해? 무엇보다 돈이 너무 들어간다. 

이야기가 옆길로 좀 샜다.

아무튼 혁명은 변방, 그리고 주류가 되지 못한 불만 집단이 주도한다는 사실을 위만과 온조는 여실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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