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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도로서의 조선고고학, 그 위대한 설계자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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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판승미黑板勝美, 쿠로이타 카쯔미, 현행 외래어 표기로는 구로이타 가쓰미인 이 양반은 수십년래 내 화두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생김새는 조폭 두목. 제도로서의 한국고고학 조선고고학을 확립한 주축이다.

그는 일본 고문서학의 히말라야요 동양사의 후지산이다.

첫째..이런 그가 왜 그리도 고고학에 집착했는가?
둘째, 이런 그가 왜 그리도 조선에 집착했는가?
셋째, 이런 그가 왜 고적조사연구회를 꾸려 사방팔방으로 모금을 하러 다녔는가?

 

구로이타 가쓰미



1915년 그는 도쿄제국대학에 출장 복명서를 낸다. 백일 동안 조선 각지를 조사하겠다는 담대한 계획이었다. 실제 그는 그리했다.

그해 부여에 들른 그는 삽자루를 잡고는 능산리 무덤 두 기를 파헤쳤다. 왜그랬을까?

조선사편수회 회의록을 보면 모든 회의는 흑판이 주도한다.

모든 발제는 흑판에게 나와서 그에게 수렴된다.

도대체 왜 이 칠판씨는 그리도 조선에 얽매였을까? (2017. 1. 4)

***

구로이타는 (그냥 일본에만 있었으면 일본 고문서학만 하고 조선에 관심을 안 가졌을 수도 있는데) 1908년부터 2년간의 유럽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하필이면 궁내성으로부터 유럽 각지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의 '진열 고화기물 보호법'에 관한 조사를 명받는다.

당시 유학에서 선진적인 미술관, 박물관의 진열 및사적 보호의 노하우를 배우면서 뭔가 깨닫는게 있었을 것이고, 돌아오니 마침 한일합병이 일어나자, 마침내 그때 얻은 노하울 일본뿐 아니라 조선에도 추진해보자는 의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 외우 이정우 선생 지적이다.)

그 직후, 그 여행 중에 장대한 기고문을 쓴다. 역사학잡지인가에다가 8회인가 걸친 장기 연재다.

그 글을 하나하나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꿈을 펼치기엔 이미 일본은 이스태블리시먼트 아니었던가 한다. 그가 조선에 건너온 이유가 이것이 아닌가 한다.

자기 꿈을 제도로서 펼치기엔 조선이나 대만이 안성맞춤이었다. 왜? 무주공산이었으니깐.

구로이타에게 조선은 자기 왕국이었다. 쿠로이타 제국으로서의 조선.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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