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에서 이른바 강동육주江東六州가 언제나 매개 변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했거니와,
하지만 이 강동6주라는 말은 근대 역사학이 만들어낸 데 지나지 아니하고, 무엇보다 고려 측 기록, 곧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아도 州는 가당치도 않고, 변방 군사 요새 지역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니, 그보다는 성城이라는 개념으로 치환해 이해하는 편이 옳다.
더구나 내용을 뜯어보면 6주가 아니라, 거란에서 할양받은(엄밀히는 거란 묵인 하에 고려가 여진을 정벌하고 얻은) 땅에다가 8개 성을 설치한 것으로 문헌에는 보인다.
앞서 나도 지적했듯이 이 강동육주라는 말이 여러 모로 당시 두 나라 사이 국제관계를 설명하는데 편리한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 해서 편리하다 해서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근대 역사학은 강동육주라는 말을 만들어냈을까?
예서 유의할 점은 저 말은 강 동쪽에 있는 여섯 개 고을이라는 뜻이라, 이 경우 강은 압록강이다. 압록강은 당시에 이미 압록강이라 불렀다.
고려 기준이라면 개성을 기준으로 명명해야 할 법한데, 저 강동육주는 실상 거란 중심주의 시각이 농후한 말이다. 그래서 저 강동육주라는 표현은 적어도 고려사 주체 시각을 표명한다면 버려야 한다.
고려 기준으로 서쪽 변경을 논하는데 어찌하여 가당치도 않게 동쪽이란 말인가?
저 말이 굳이 의미가 고려 측 시각으로 있으려면 강서江西육주라 해야 한다. 예서 기준이 되는 강은 당연히 청천강 혹은 그 지류로 꽤 규모를 자랑하는 대령강이다. 왜? 이른바 강동육주는 압록강과 청천강 혹은 대령강 사이에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강동 육주라는 말을 냈을까?
외우 홀애비 기호철 선생에 의하면 강동육주라는 말은 두계 이병도가 1923년 동아일보에 《조선사개강朝鮮史槪講》을 연재하면서 쓰기 시작했다는데, 요사遼史에 보이는 詔復取六州地 라는 구절과 江東 이라는 말을 결합해 만들어 쓴 용어로 추정된다고 한다.
*** related articles ***
서희와 강감찬, 그 공통분모 강동6주
강동6주? 서희가 강제로 탈취했지 거져 얻은 것이 아니다
강동육주와 대령강장성
강동육주, 고려거란전쟁의 최대 변수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땅딸보에 못생긴 강감찬, 최수종은 아니었다 (0) | 2024.02.01 |
---|---|
목은 이색을 어찌 볼 것인가? (0) | 2024.02.01 |
윤관9성과 자본, 식민지 경영을 생각한다 (1) | 2024.02.01 |
울릉도는 공도空島가 아니라 왕화王化 밖이었다 (0) | 2024.01.31 |
쏜살 같은 도망길, 돌아올 땐 장가도 가고 느릿느릿 고려 현종 (0) | 2024.01.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