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달 소나무 틈을 비추는데>
1. 휘영청 달이 돋았다. 오래 묵은 소나무 등걸이 용틀임하듯 굽어 뻗쳤는데 그 아래로 시냇물인지, 물줄기 하나가 제법 폭포 느낌을 내며 흐른다. 달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그 정경을 화가는 참 호방하게도 그려냈다. 약주 몇 잔 하시고 흥이 올랐는지, 옅은 먹을 찍은 붓을 휘두르고 채색을 살짝 더한 뒤에 다시 진한 먹을 쿡 찍어 화제를 썼다.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又淸
'우청'이 이 그림을 그린 분인 모양인데, 그러면 이렇듯 상남자 스타일로 왕유王維의 시를 풀어낸 우청은 과연 누구인가.
2. 형제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4형제가 같은 업을 가졌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그런 형제들이 일찍이 있었다. 개성 출신 황씨 4형제 ㅡ 우석 황종하(1887-1952), 우청 황성하(1891-1965), 청몽 황경하(1895-?), 미산 황용하(1899-?)가 그 주인공이다. 우석은 호랑이로 이름을 떨쳤고, 우청은 지두指頭 산수화, 청몽은 인삼 그림, 미산은 사군자에 능했다. 이들은 합동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로 우애도 돈독했는데, 한국전쟁으로 위의 둘은 이남에, 아래 둘은 이북에 남아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둘째 황성하의 호가 우청이다. 맞다. 이 그림을 그린 분이다.
3. 산수와 고사인물, 동물을 지두, 곧 손가락 끝에 먹을 묻혀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던 황성하. 그런데 소나무를 그린 작품은 퍽 드물다. 게다가 병풍 낱장이나 소품이 아니라 현판이다. 가로그림이라 구도 잡기 어려웠을 텐데도 별 고민을 하지 않고 슥슥 그려낸 것이, 그 내공을 짐작케 한다. 대부분은 붓을 댔지만, 어디엔가는 손가락으로 그린 부분도 있을 성 싶다.
4. 우연히 이 작품을 보게 되었다. 예전엔 제법 큰 값을 받았겠건만, 지금은 한국화 가격이 많이 내려가 그 주인도, 나도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보고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으니 다행이랄까. 주인의 허락을 얻어 사진을 박고 글을 적어본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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