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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김규진이 다시 건 평양 부벽루 편액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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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을 보다가>



1915년 8월 3일자 <매일신보>는 큼지막한 사진 하나를 싣는다. 강산여화江山如畫라는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85-1840)의 글씨 편액이다.

그런데 편액에는 그 넉 자만 붙은 게 아니었다. 거기에 덧붙은 글이며, 양 옆에 "부벽루浮碧樓에 게揭할 편액扁額"이란 제목으로 실린 신문기사를 살펴보면 저 편액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내력이 나온다.

평양의 부벽루라면 고려의 문인 김황원金黃元(1045-1117)이 올라 서경西京을 내려다보며 "긴 성벽 한쪽 면엔 늠실늠실 강물이요, 큰 들판 동쪽 머리엔 띄엄띄엄 산들일세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라는 구절을 짓고 더 이상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통곡했다던 명소가 아니던가.

거기에 평양이 낳은 기인奇人 명필 눌인의 "강산이 그림 같구나!"란 지두서(指頭書, 손가락으로 쓴 글씨) 편액이 걸리니 금상첨화였다.




헌데...언제부터인지 눌인의 "강산여화" 편액이 사라져버렸다. 말해 무엇하랴, 누가 훔쳐간 것이지. 그래 평양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된지 얼마 안 된 1915년 무렵, 경성 하세가와쵸(長谷川町, 지금의 소공동)에 있던 고금서화관古今書畫觀에 탁본첩 하나가 들어온다. 펼쳐보니 눌인의 "강산여화" 탁본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평을 쓴 것. 그 내용은 이러했다.

이것은 눌인 조광진이 지두指頭로 쓴 글씨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의 필의筆意로 위나라 종요鐘繇와 진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운용했는데, 그 신묘함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강江자의 물수변氵점은 그 원본原本과 견주자면 아직 열에 하나 둘도 모양을 본뜨지 못하였다. 패수귀객浿水歸客은 제한다.
此訥人指書, 以篆隸意運鐘王法, 神妙不測, 如江字水點, 較之眞原本, 尙不能形模其一二. 浿水歸客題.


고금서화관 주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4-1933)은 남 모를 감격에 몸을 떨었으리라. 그는 평양 생활권인 평안남도 상원군, 검은모루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외숙이자 서화 스승이었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1836-1909)는 눌인의 제자였다. 나이로 보아 직접 배운 것은 아니겠고 사숙私淑했거나 진짜 제자에게 배웠겠지만.




인연이구나! 했을 것이다 해강 선생은. 자기 자신이 평안도 사람으로 눌인의 손제자孫弟子뻘이자 추사만큼이나 조선에 큰 영향을 드리웠다 자부할 만한 서화가 아니던가. 내심 자신이 이 둘을 모두 계승한다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그는 눌인의 탁본과 추사의 평어를 정밀히 쌍구雙鉤하고 자기의 발문까지 덧붙여 새 현판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부벽루 옛 자리에 걸기 위해 관청의 허가를 받아낸다. 일제 당국 입장에서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허가는 순순히 떨어졌고, <매일신보>에까지 그 소식이 제법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 기사가 나오고 일주일 뒤, <매일신보>는 단신 하나를 싣는다. 새 "강산여화" 편액이 8월 6일 평양에 도착해서, 일간 걸 예정이라고. 그 뒤 저 현판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한동안 남북간의 길이 열렸을 때도 부벽루를 가본 분이 없다고 하니 저 현판이 남아있는지 여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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