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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목은화상기牧隱畫像記, 미수 허목이 채록한 이색 초상 모사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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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거치지 않고서도 영의정까지 역임한 남인 오야붕으로 당시로서도 86세로 기록적인 장수를 하며(1595~1682), 그 반대편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사사건건 한판 뜬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하도 살기도 오래 살고, 거기다가 생각하는 바는 모름지기 발표를 해야 하는 성정이라

여기저기 각종 sns에서다가 질러 놓은 글을 묶기는 해야겠지만, 스스로도 분류 체계화할 뾰죽한 방안이 없어 그냥 디립다 발표 일자별로 줄세우기를 하고는 편목이랍시며 붙이기는 했지만, 제목 역시 마뜩치 아니해서 댓글집이라고 붙이기도 그래서 기냥 심심풀이 파적으로 적은 글이라 해서 기언記言이라는 이름을 다니

그 권 제9 상편上篇에는 도상圖像이라는 챕터를 설정하고는 그에다가 화기畵記류 관련 글을 쑤셔 박으니, 개중 하나가 제목이 목은화상기牧隱畫像記라

 

허목. 이 시대 이 양반들은 어째 투쟁꾼 같이 다 생기셨다. 우암도 그렇고

 
 
제목으로 보면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 영정에다가 붙인 글이라, 실제로도 그러하니, 이 짧은 글은 조선시대 미술사, 특히 초상 문화사를 이야기할 적에는 빼놓을 수 없어 자주 인용되기도 하거니와 

유의할 점은 이 글을 쓴 시점이 갑오년이라 했으니, 효종 5년 1654년이라, 이때 미수는 이제 환갑이라 늙은이 축에 속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총기가 많이 흐릴 나이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산수 착오를 빚으니 

如컨대, 목은이 몰沒한 시기가 태조 6년 1396년임에도 홍무洪武 26년 계유 1393년 태조 2년에 별세했다고 하는가 하면, 아래 인용문 주석에서 보이듯이 덧샘도 제대로 하지 못해 100년을 124년이라 착란하기도 하니 

왜 이런 일이 빚어졌을까 생각하니, 제자나 자식한테 대필케 하고는 자신은 교감도 아니하고 그냥 발표해 버려서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본인 글이라면 총기가 사그라들어서겠지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문인 권근 찬 이라는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초상이 허목이 말한 그것이다. 이 초상 설명은 이 글 맨 뒤를 참조하라.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이색李穡) 화상은 호서湖西 한산군韓山郡에 위치한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다. 화상 찬贊은 권 양촌權陽村(권근權近)이 지었고 그 뒷면에 ‘영락永樂 갑오(1414, 태종 14) 9월 하순에 문인 권근이 씀’이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에 있는 이씨 고택에도 문정공文靖公 영당影堂이 있다. 이 영정에는 연도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 9)으로 되어 있어, 화상을 처음으로 그린 연도를 알 수가 없다.

우리 태조太祖(이성계)께서 선위禪位 받으신 다음 해인 홍무洪武 26년 계유(1393, 태조 2)에 공이 별세하였으니, 양촌이 찬을 쓴 것은 별세한 지 수십여 년 지나서이다. 영락 갑오년에서 정덕 갑술년까지는 124년이고, 홍무 계유년에서 현재의 숭정후崇禎後 10년(1654, 효종5)까지는 약 300년이다.

영정은 애초에 두 본이 있었다. 한 본은 머리에 치관豸冠을 쓰고 허리에 서각대犀角帶를 두른 붉은 관복에 수염과 머리가 반백인 모습인데 지금 서원 소장본이 이것이고, 영당에 모셔져 있는 본도 이 본을 모사模寫한 것이다. 다른 한 본은 촌로村老 복장이다.

아, 슬프다. 문정공이 유리流離할 때에 읊은 감회시感懷詩를 읽어 본 적이 있는데, 고려가 망한 뒤에 자신을 촌로와 같이 생각하였으니 당시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 본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서원에 있는 본은 만력萬曆 연간의 병란(兵亂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는데 뒤에 사신이 일본에서 이것을 돌려받았다. 이때 일본 부로父老들이 영정을 돌려주며 “이것은 옛 귀인의 화상이니 그 자손에게 돌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기이하다. 이는 귀신이 한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옛 화상은 오랜 세월에 마멸되어 비단이 삭고 찢어져 아래 절반 정도가 없어졌다.

지금의 주상전하 5년 겨울에 문정공 자손들이 화상을 받들고 서울로 와 두 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태창동太倉洞에 있는 이 중추李中樞(이현영李顯英) 고택에 봉안하고 또 한 본은 구본과 함께 문헌사당文獻祠堂(문헌서원)에 다시 모셨다.

갑오년(1654, 효종 5) 동지에 외손 양천陽川 허목은 삼가 쓰다.
중제仲弟 의懿가 중림 찰방重林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하였다.

사예司藝 이전李䆄이 이 일을 주관하였다.


牧隱畫像記

牧隱李文靖公圖像。在湖西韓山郡之文獻書院。其贊。權陽村之作也。書其後曰。永樂甲午九月下澣。門人權近記。德山縣李氏舊莊。又有文靖公影堂。其影子所記年月。正德甲戌云。不知其初傳畫在某年。我太祖受禪之明年。公歿。當洪武二十六年癸酉。陽村之贊。蓋在數十餘年之後。自永樂甲午。至正德甲戌。其間一百二a098_062b十四年。自洪武癸酉。至今去崇禎已十年。蓋三百年。影子初有二本。一本豸冠犀帶緋袍。鬚髮斑白。今書院所藏本是也。影堂本。從此本傳之也。一本田野之服。悲夫。嘗誦流離感懷詩。亡國之後。自同田父野老。見當時之畫可知。恨此本不傳。書院本。當萬曆兵亂失之。後有奉使者得於日本。其國之父老持贈曰。此古貴人圖畫。還寄其子孫云。異哉。此鬼神爲之。非人事之所期者也。古畫淪落歲久。綃剝裂。亡其下一半矣。五年冬。子姓諸族。奉圖像入京。摸寫二本。一本。奉a098_062c安於太倉洞李中樞舊第。一本。幷舊本。還奉文獻祠堂。甲午冬日至。外裔子孫陽川許穆。謹識。
仲弟懿重林時所摸畫。
李司藝䆄幹此事。

[주-D001] 124년 : 100년인데, 잘못 계산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하운하 (역) | 2006

植補注
한산군韓山郡 : 조선시대 충청도 공주목 소속 현으로 태종 13년(1413) 군으로 승격해 존재하다가 1914년 서천군에 병합되었다. 목은 집안 본향이다. 

문헌서원文獻書院 :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 (영모리)에 있는 서원이다. 그 전신은 애초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과 목은 이색을 배향하고자 1594년(선조 27)에 건립했다가 곧바로 전란에 소실되어 1610년(광해군 3)에 한산 고촌으로 옮겨 다시 세우고 이듬해 사액되면서 이종학·이자·이개 셋을 추가 배향했다.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가 1968년 복원했다. 
문인 권근權近 : 양촌(1352~1409)은 고려 말 조선 초 문한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색과 정몽주한테서 배웠다. 

덕산현德山縣 : 이산현伊山縣과 덕풍현德豐縣을 태종太宗 5년에 합쳐 탄생한 지방행정 조직으로 현재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일대다. 
 
손 댈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서 중단한다. 이러다 화병 나겠다. 

암튼 저 글로 하나만으로는 목은 초상이 유래 전파한 양상은 불명확한 데 천지다. 이를 분석한 논문도 없지는 않은 듯한데 나는 아직 참고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수송동 연합뉴스 코 앞에는 목은 영당이 있으니, 이것과의 관계도 조사해야 봐야 한다. 
 
허목이 말한 이 초상이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니, 그에 대한 문화재청 안내는 아래와 같다. 

 
보물
이색 초상 - 목은영당본 (李穡 肖像 - 牧隱影堂本)
Portraits of Yi Saek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수량/면적 2폭 <대본(大本) 1폭, 소본(小本) 1폭>
지정(등록)일 1995.03.10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시 대 조선 효종 5년(1654)
소유자(소유단체) 한*** 
관리자(관리단체) 국***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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