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도 빨리빨리>
<동국이상국집> 전집 권24를 보면 "계양桂陽의 초정기草亭記"란 글이 있다. 계양, 곧 인천광역시 계양구와 부평구, 서울 구로구 등지를 합친 지역의 부구청장 격이었던 이규보가 거기 있던 초가지붕 정자 하나를 재건하며 적은 기문記文이다. 그걸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오기 전에 이 정자는 뜻밖에 거문고를 불태우고 학鶴을 굽는 자(필자 주: 풍류라고는 모르는 인간)에게 헐리게 되어 황폐하고 쓸쓸한 옛터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슬프게 여겨 고을의 아전을 불러 말하기를,
“이 정자는 이실충李實忠 태수太守가 창건한 것인데, 무엇이 너희 고을을 해롭게 했기에 감히 헐어버렸더냐. 옛사람은 그 사람됨을 사모하여 감당(甘棠, 아가위나무)을 베지 않은 일이 있었거늘, 너희 고을에서는 감히 정자를 헐었느냐?” 라고 하였다.
정자가 있을 만한 자리에 예부터 정자를 세웠는데, 어떻게 그걸 헐어버릴 수 있느냐 이 풍류도 모르는....이라는 힐난이다. 고을 향리는 이를 듣고 어떻게 하였느냐 하면
향리는 묵묵히 물러가 옛 재목을 찾아 모아서 잠깐 동안에 다시 세우고 이튿날 일을 마쳤다고 내게 와서 보고하였다. 내가 동료들과 더불어 술자리를 베풀고 낙성식을 하였다.
하루만에 정자를 뚝딱 세우고 말았다. 정자가 서까래 10개짜리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그 유명한 한국 건설업계의 공용어 "빨리빨리"가 고려시대부터 적용되던 이야기였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무슨 텐트도 아니고 말이지.
하여간 그렇게 하루만에 정자가 세워지자마자 이규보는 술자리를 베풀었다.
술 마실 핑계가 이렇게 빨리 만들어지니 어찌 아니 기뻤으랴.
*** editor's note ***
이규보 저 말은 이전 건물을 헐어버렸다가 하룻만에 뚝딱 정자를 세웠다는 말이다.
이를 보고 이규보는 혀를 찾지만, 왜 그랬을까?
그래야 건설업자들이 먹고 살며, 또 그에서 삥을 뜯어 향리들이 먹고 살기 때문이지 뭐가 있겠는가?
그때라고 달랐을 것 같은가? 이문건 묵재일기를 읽어보면 저런 사람들 농간이 처절하게 드러난다.
물주는 저런 건설업자들 땡깡에 옴짝달짝을 못한다. 왜? 답답한 건 의뢰자들이지 건설업자가 아닌 까닭이다.
결국 제때 완공을 위해서는 돈을 먹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리 조상은 철저히 쌓았다고?
그래서 나무는 갈라지지 않았다고?
숭례문 사태 때 저런 밑도끝도 없는 말이 난무했다.
광화문 현판 갈라지자 저런 말이 난무했다.
새빨간 거짓이다.
그냥 대충대충 지어 대충대충 살았다.
나무는 건물 들어서자마자 갈라졌다.
왜?
갈라지지 않음 살아남을 수 없으니깐.
한반도가 내내 건조한 타클라마칸 사막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단군할아버지는 저주받은 풍토를 남겨주셨다.
#부실시공 #급조 #이규보 #대충대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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