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05.08 11:03:25
<역사이야기>-① 백제는 한강을 잃지 않았다
※편집자주 = 최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계기로 여기에 분개하는 국내 여론이 높아지고 아울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 국사교과서, 혹은 우리 학계의 연구수준이 어떤지도 냉철히 짚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에 연합뉴스는 한일 두 나라 역사교과서는 물론 현재 우리 학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주장'들이 과연 얼마나 사실(史實)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탐색하자는 뜻에서 <역사이야기>라는 코너를 마련, 적절한 주제를 골라 주 2회씩 모두 20여회에 걸쳐 송고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현행 국사교과서는 중학교용이나 고교용이나 가릴 것 없이 서기 475년 백제가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 전체를 상실했다고 하면서 이 즈음 만주와 한반도 강역을 아주 똑같은 지도로 싣고 있다.
이 지도를 보면 고구려는 서해안의 온양만과 동해안의 영일만을 동서로 가르는 광활한 지역까지 남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돼 있다. 이 지도만 보면 신라와 백제는 북쪽에서 죄어오는 고구려에 숨통이 막힐 정도로 찌그러진 깡통 모습을 하고 있다.
한국 고대사학자 대부분은 국사교과서처럼 475년 전쟁 결과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 북쪽은 물론이고 그 남쪽도 잃었다가 약 80년 뒤인 서기 551년 신라군과 합동 작전을 개시한 백제가 이를 탈환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물론 475년 전쟁 당시 백제는 비록 한성이 무너지고 개로왕과 그 일족이 몰살당했을망정 한강 유역을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반론이 있기는 하지만 별다른 반향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 통설을 만든 사람들이 이병도를 필두로 이기백씨 같은 이른바 '거물'들이니 반박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주 이상한 것은 기존 통설이 백제가 한성을 함락당하고 도읍까지 웅진(공주)으로 옮겼으므로 한강 유역 또한 고구려에 빼앗겼으리라는 막연한 선입관에서 나온 것일 뿐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기록을 들춰볼 때 백제는 475년 한성 함락 이후에도 한동안 한강 유역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만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4년 기록을 보면 "말갈이 한산성을 깨뜨렸다" 하고 이듬해에는 "왕이 사냥을 나갔는데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을 위로했다"고 하며 같은 왕 21년조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한산 사람중에 고구려로 도망해 들어간 이가 2천명이었다"고 하고 있다.
또 무령왕 7년 겨울 11월에는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공모해 한성을 치고자 했다 하며 같은 왕 23년조에는 왕이 한성으로 행차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성은 두말할 것 없이 475년 전쟁에 고구려에 함락된 백제 왕도이며 한산 또한 이미 한성 도읍 때에도 고구려 정벌을 위한 백제의 전진기지였음에 미루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음은 틀림없다.
이런 기록들은 백제가 475년 전쟁 이후에도 적어도 수십년 동안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적이 없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런 증거는 또 있다. 백제는 동성왕 17년 8월과 무령왕 즉위년 11월에 각각 치양성(雉壤城)과 수곡성(水谷城)이라는 곳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수곡성과 치양성은 백제의 한성 도읍기에 이미 빈번히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던 곳이다.
한성 도읍기 두 나라 국경이 한강에서 북쪽으로 훨씬 올라간 임진강 혹은 황해도 일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니 웅진 도읍기 수곡성과 치양성이 날개를 달아 어디론가 훌쩍 날아갔다면 모를까 위치는 변동이 없다.
이런 것들 말고도 475년 전쟁 이후에도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있다.
고구려 3만 대군이 왕도로 쳐들어오자 백제 개로왕은 아들(혹은 동생)인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병을 얻어오게 한다. 이에 따라 문주는 신라 자비왕에게 1만명을 얻어 한성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한성은 이미 고구려군의 말발굽에 쑥대밭이 돼 있었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원년조에서 "고구려군이 비록 물러갔으나 성은 함락하고 왕(개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즉위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고구려군은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 다음 물러갔다고 했다. 이는 한성 함락 뒤 고구려군이 그곳에 진주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 다른 기록을 보자. 문주는 한성을 떠나 남쪽으로 달려 웅진(공주)에 정착한다. 재위 불과 4년만에 권신 해구에게 암살당하는 문주왕 재위 때 「삼국사기」 기록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재위 2년째인 476년 2월 대목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대두성(大豆城)을 수리하고 한강 이북의 백성들을 옮겼다"
대두성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한강 이북 백성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함은 웅진 시대에도 한강 남쪽은 물론이려니와 그 북쪽조차 여전히 백제 수중에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인 대목이다.
이처럼 무수한 증거가 있음에도 어찌된 셈인지 실증, 실증을 외치는 학계는 이런 기록들은 가짜라느니, 한강 유역 상실과 함께 한강 유역 지명들이 대거 남쪽으로 밀려내려왔다는 소설같은 상상력을 가미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한강 유역을 몽땅 상실하고는 한반도 서남쪽 귀퉁이 소국(小國)으로 쪼그라들고 말았노라고.
taeshik@yonhapnews.net
(끝)
2001.05.11 07:15:16
<역사이야기>-②백제의 한강 상실, 그 희한한 등식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앞서 한국 고대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와 달리 백제는 475년 전쟁에서 고구려에 대패해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을 비롯한 왕족이 몰살되다시피 했음에도, 적어도 무령왕 재위(501-523년) 때까지 한강 유역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많은 증거를 「삼국사기」 기록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런 기록들이 백제는 475년 이래 신라 진흥왕과 함께 대대적인 고구려 공략에 나서게 되는 551년까지 약 80년 동안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점령당해 있었다고 보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많은 이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차를 타고 달리기 위해서는 가로대는 들이받아 부수어 버리든지 치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백제=한강 유역 상실'이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를 가로막는 그렇지 않은 증거들을 어떻게든 걷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학계는 어떤 방법을 썼을까.
첫째, 백제가 475년 전쟁 이후에도 한강 유역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었다는 기록들을 모조리 가짜라고 몰아붙이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둘째가 아주 기발한데, 이른바 '지명 이동설'로 설명한다. 즉 백제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난 뒤 웅진으로 밀려 내려오면서 한강 유역에 있던 지명조차 끌고 내려왔다는 것이다.
첫번째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이 한국실증사학의 대부라는 이병도. 그는 백제가 475년 이후에도 한동안 한강 유역을 상실하지 않았다는 「삼국사기」 기록들을 "신빙성이 없다"는 단 한 마디로 걷어찼다.
1977년 출간한 「국역 삼국사기」(을유문화사 펴냄)라는 「삼국사기」 번역해설서에서 이병도는 동성왕 재위 4년째 9월에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해 깨뜨리고는 300여호(戶)를 사로잡아 돌아갔다"는 기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때 (한강 유역을 포함하여) 죽령(竹嶺), 조령(鳥嶺)에서 차령산맥에 이르는 일대가 대체로 제려(濟麗. 백제와 고구려-필자 붙임)의 국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이른바 한산성은 분명히 백제의 영토가 될 수 없었다. 이하에도 백제가 마치 한강 유역 일대를 점유하고 있는 것 같은 기사가 자주 나오는데 모두 그 신빙성이 없다"
이처럼 이병도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철석같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반대되는 「삼국사기」 기록은 전부 가짜라고 잘랐다.
이는 제8대 고이왕 대 이후 「삼국사기」 기록은 신뢰한 것으로 알려진 이병도가 실은 그 이후 기록에 대해서도 얼마나 극도의 불신을 보내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두번째 '지명 이동설'은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가 리더격이다. 즉 그는 웅진 도읍기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한성이 지금의 충남 직산으로 이동해 왔으므로 동성왕과 무령왕이 행차했던 한성 또한 지금의 서울 혹은 광주 일대가 아니라 실은 충남 아산 일대의 직산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그러한 근거로 「삼국유사」에 직산을 위례성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들었는데 많은 학자가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첫째, 한성이 이동했다는 증거가 그 어디에도 없을 뿐더러, 둘째 설사 직산이 위례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곧 지명 이동한 결과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며 셋째, 설혹 한성이 이동해 왔다 해도 한성 도읍기 한강 북쪽에 있었음이 확실한 수곡성과 치양성, 한산성 따위의 다른 지명도 모조리 한성을 따라 한강 남쪽 어딘가로 이동했다는 추정을 결코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요컨대 기록을 가짜로 본 이병도나 땅이 축지법을 썼다고 본 이기백 교수 가릴 것 없이 실증, 혹은 엄격한 사료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실은 사료를 지극히 자의적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taeshik@yna.co.kr
(끝)
***
475년 전쟁에 백제가 참패했다 해서 백제가 그때 한강 유역을 상실했다는 믿음은 환상이다. 모든 기록이 그것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그렇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왜 백제를 떼어다가 고구려에 주는가?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이런 주장이 여전히 나온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종래에는 문헌사학도가 이런 주장을 일삼았다면, 근자에는 아차산 홍련봉 일대 이른바 고구려 보루라는 것을 파제낀 고고학도들이 가세해서 그런 주장을 더욱 보강하려 한다.
심지어 호자虎子라는 이른바 고구려 그릇 바닥에서 나온 글자까지 어거지로 경자庚子라는 글자로 오독하고서는 봐라 경자년에 고구려가 이미 아차산에 들어와 있지 않냐 강짜를 부리는 모습은 기가 찬다.
홍련봉에 남은 고구려의 두 아들〔子〕- 경자庚子와 호자虎子 사이에서
여호규 선생 알림을 보니 475년 전쟁으로 백제가 한성을 상실했는가 아니했는가를 주제로 삼는 토론회가 한성백제박물관에 있다 하는데, 여 선생도 시종일관 저 한강 유역 고구려 쟁탈성 신봉자라는 글을 봤다. 혹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라면 질정 바란다.
저게 무슨 쟁점인가?
백제는 한강유역을 상실하지 않았다. 이 명백한 사실을 왜 논쟁으로 끌어내는가?
발표자 중에 양시은 선생이 보이는데, 이 양반은 절대적인 고구려주의자라, 아예 한강 유역 고구려 점유를 염두에 두고 보루 유적을 파는 모습을 봤고, 시종일관 그런 시각에서 보고서를 쓰고 글을 쓰는 모습을 죽 지켜봤다.
저와 같은 주장을 시종 일관 펴는 다른 축은 같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출신 최종택 선생이다.
보루 유적이 고구려 유산으로 드러난 것과 고구려가 475년 이래 죽 한강 유역을 점유했다는 것은 반딧불과 번갯불의 차이다.
둘은 다르다!
그렇게 많이 파제꼈다는 그런 고구려 유물 어디에도 내가 475년 이후 우리가 죽 한강을 점유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은 단 한 점도 없다.
함에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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