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1이규보도 사실 벅차지만, 일요일이니 비축분 푼다 생각하고 하나 더 올려본다.
앞서도 여러 번 봤지만 우리의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의 형편은 그닥 넉넉지 못했다.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어도 빠듯한 살림살이를 한탄하는 문구는 <동국이상국집>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고수는 많다. 오죽하면 주변머리없는 이규보에게까지 쌀을 꾸는 사람이 다 있었다.
동년同年이라고 하니 이규보와 같은 해 과거에 붙은 인물인가본데, 관직을 얻지 못한 백수 신세였던 모양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상대가 궁중에서 숙직을 서고 있는데 집도 아니고 그쪽으로 편지를 다 보냈겠는가.
당직근무 서고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궁 밖을 나서려다 그 편지를 본 백운거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는지.
얼마 전까지 같은 처지였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을까, 아니면 내가 저 친구보단 낫다는 자기위안이 먼저였을까.
아무개는 아룁니다. 며칠 전 서액西掖에서 숙직宿直하고 그 이튿날 정오를 지나서 막 물러나려다가 전날 밤에 부쳐온 편지를 보았습니다.
적힌 내용은 다 알았습니다만 미처 다 보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측연惻然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근래에 국고가 비어 제때에 봉록을 받지 못하므로 자주 곤궁한 경우를 만납니다. 이것은 그대가 아니면 자세히 모를 것입니다.
상상컨대 그대 집의 오리 소리(역자 주: 아이들 울음소리를 비유)가 내 집보다 크므로 이렇게 부탁해 온 듯합니다.
이는 바로 매성유梅聖兪가 말한 바 ‘큰 가난이 작은 가난에게 구걸하게 되니 어찌 서로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니, 그대가 나에게 구걸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있고 없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누가 덜 가난하고 더 가난한가를 따지지 않겠습니다.
간직한 쌀 약간을 보내니, 적게 보냈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라오. 남은 말은 보류해 두었다가 상면할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2, 서書, "과거 동기인 노생盧生에게 손수 적어 보내는 간찰與同年盧生手簡"
안그래도 부족한데 쌀을 꿔줬다고 그날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진 않았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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