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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지방관의 두 가지 자세, 너무 다른 제주목사 최전과 이종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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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성종 때 제주목사로 왔던 최전崔湔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무관 출신인데, 제주목사로 있으면서 온갖 재물을 긁어모아 배로 연이어 실어날랐다고 한다.


제주 괸덕정. 제주목관아 부속건물이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 사람의 동생이 최반崔潘이라는 사람인데, 김제군수로 있으면서 어찌나 포악했던지, <성종실록>을 보면 김제 고을 사람들이 "내 자식놈"이라고 하며 욕을 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인데, 어느 날 최전 형제의 아버지가 김제 고을을 들렀다가 채 익지도 않은 보리를 베는 농부를 만났다. 왜 덜 익은 보리를 베냐고 물으니 그 농부가 한숨쉬며 하는 대답이 걸작이었다.

군수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는 바람에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도망하여 흩어지니, 어느 겨를에 보리가 익기를 기다리겠습니까? 군수는 그만두고라도, 들으니 그 아비가 늙었다고 하는데, 어찌 속히 죽어 군수로 하여금 자리를 그만두게 하여 백성이 다시 숨쉬고 살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 <성종실록> 성종 24년(1493) 12월 24일 기사 중에서

그 아버지 되는 분은 통곡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결국 최반은 김제군수 자리에 있으면서 빼돌린 "면포綿布 108필匹, 쌀 합계 16석碩, 깨[荏子] 20두(斗, 말), 겨자[芥子] 2두, 누룩[麯] 50원圓, 기름[油] 7두 8승(升, 되) 2홉"을 집에 옮기다가 꼬리가 잡혔다.

이때 최반에게 내려진 형벌은 교대시絞待時 곧 잡아 가두어두었다가 길일을 점쳐 목을 매다는 것이었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2. 같은 성종 시대,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종윤李從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분은 최전, 최반 형제와는 결이 달랐다.

그가 임기를 다 채우고 돌아가려고 하자 제주 백성 300여 명이 연명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전번의 목사들은 으레 모두 군무軍務에만 유의留意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판관判官에게 일임하였었는데, 이번에 온 목사 이종윤은 그렇지 아니하여 판관과 더불어 함께 앉아서 일을 처리하며, 민간의 소송訴訟 관계도 온종일 직접 판결하여 송정訟庭에 남아 있는 송사가 없고 감옥에 억울한 백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민流民들이 스스로 돌아오며 생활이 안정되고 생업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고만考滿으로 체임遞任하게 되었는데, 마치 어린아이가 유모乳母를 잃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유임하게 해주소서.

- <성종실록> 권267, 성종 23년(1492) 7월 22일 기사 중에서

이에 성종은 이조, 승정원과 의논해 이종윤에게 명나라 옷감을 하사하고 제주목사로 유임시켰다.

유임시킨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열심히 일을 했던지, 성종 25년(1494) 12월 14일 제주에서 죽고 만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이종윤의 아내에게 1달치 녹봉을 주며 장례 비용에 보태도록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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