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에도시대는 사농공상의 신분이 철저하였고 이에 따른 직역이 대대로 유지되었다.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막부나 번에 의해 고용된 봉급생활자나 다름없었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그 봉급이 잘못이 없는 한 평생 주어지고 대를 이어 승계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일본 근대화의 기점이 된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이 사농공상 중에서 사, 그러니까 사무라이 계급이 주동이 되었다.
하지만 사무라이 계급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위로는 막부관리부터 아래로는 지방 각 번 말단 하급 무사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에도시대 후기로 올수록 사무라이계급은 점점 녹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상황으로 몰렸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하급무사 생활은 비참할 정도로서 녹봉만으로 생활이 안 되어 각종 부업을 하거나 심지어는 농민 수준의 생활도 안 되는 하급무사도 부지기수였다.
일본 시대극을 보면 이러한 하급무사들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꽤 있다.
재미있는 것은 메이지유신 주체는 사무라이 중에서도 바로 이들, 하급 무사들이었다는 점이다.
메이지유신 주동이 된 인물들을 보면 사무라이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별로 없지만 반면 이들 대부분은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급무사들로서 에도 막번 체제하에서는 사무라이 계급 중하층을 이룬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한국사로 본다면 가장 유사한 계층은 잔반과 중인 계급이라 할 수 있다.
아마 한국도 자주적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바로 이들, 잔반과 중인계층에서 혁명의 주도 세력이 나왔어야 했을 것이다.
각설하고,
일본 메이지유신 주체인 하급무사들은 자신들의 위에 있는 상급무사들이나 막신, 천황을 옹위하는 공경들 보기를 무능력한 바보들이라 했다.
핏줄 때문에 도쿠가와 삼백년간 사무라이 간판을 달고 대대로 먹고 살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능력도 없고 보신에 급급한 삼류로서 사무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놈들이다, 라는 것이 대략 이들의 속마음이라 할수 있는데-.
이 때문에 메이지유신기에는 막부와 샷죠(사쓰마 죠수)의 갈등 못지 않게 큰 갈등이 바로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 있었다.
결국 메이지유신 후 하급무사들은 번주, 공경들을 화족을 만들어 대접했지만 정치적 실권 자체는 자신들이 장악했는데-.
그 가장 대표격의 인물이 유신 이후 일본수상이 된, 한국사에도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이다.
그는 죠슈번 출신으로 집안이 농민 바로 위 계급인 아시가루로 사무라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처지였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 메이지유신 주체가 된 하급무사들 그 누구도 자신들이 상인이나 농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무라이라고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보기에는 진짜 사무라이란 바로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도쿠가와 삼백년간 호의호식한 상급무사들은 머리가 있을 자리에 무나 하나씩 얹어 놓은 바보들로 유신 이후 대접은 해주되 절대로 실권은 줘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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