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후 격변의 근대화를 거치면서 한국 중국 일본이 그 이전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게 된 것 같지만
알게 모르게 이 세 나라는 20세기 이전 체제의 단편을 여전히 유지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중국을 보면,
강력한 공산당 통치하에 사람들이 먹고사는 데에 열렬한 관심을 갖지만 정작 집권세력을 제외하면 정치적 표현을 극도로 낮추고 참정권에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 것은 20세기 이전 만주족 통치하의 청나라와 판박이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청나라때믜 만주족쯤에 해당하는데 만주족의 통치에 도전하지 않는 한 먹고 사는 문제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겠지만, 만주족에 대한 도전 만큼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용납하지 않은 전철 그대로 밟아 갈 것이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왜 유독 한국의 대학들이 이렇게 정치판 관심이 많은가 하는 점은 다름 아닌 조선시대 사림의 행태가 아직 척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학은 조선시대 서원쯤에 해당한다. 교수들은 산림이다.
학자로서 적당한 명망을 얻으면 연구보다는 정치 쪽에 더 관심을 갖는데 대개 조선시대 산림이 그렇게 출세하여 정승 판서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시대 이래 학자들의 정치판 간섭주의는 자유당-박정희 시대에는 표면화하지 않았는데, 이 두 정권이 대학에 정치적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대학에 "깨어 있는 지식인 교수"를 무더기로 양산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핳 수도 있겠다.
이러한 대학의 풍토는 아마 대학의 격렬한 정풍운동 없이는 100년도 더 이어질 것이다.
일본이 자기 직역을 죽도록 파며 다른 쪽 일에는 되도록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풍토는 에도시대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
일본의 기업은 미국자본주의와는 다른 점을 많이 지적하고 이것이 일본 자본주의의 특장점이라고 많이 분석되었지먄,
유심히 보면 일본의 기업은 에도시대 번과 많이 닮아 있다. 평생고용을 지향하던 버블 붕괴 이전의 일본 기업의 직원들은 에도시대 번사였던 셈이며 기업의 중역은
일본 교수들이 정치판에 진출하지 않고 자기 연구를 죽도록 파는 풍토 역시 비슷한데, 에도시대 학자라는 것이 대개 그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이러한 풍토는 한 두해로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동북아시아 세 나라는 어마어마하게 바뀐 것 같지만, 21세기에도 각 국이 이전 수백년 동안 유지해온 시스템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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