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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본 번의藩医의 한 예: 스기다 겐파쿠 杉田玄白

by 초야잠필 2022.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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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번의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한 예를 살펴보자. 일본 위키에서 그대로 따온다.

- 스기다 겐파쿠는 번의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도 번의가 되었다.
- 1733-1817 년 간 살았으니 우리 영조시대부터 순조시대까지 살던 사람이다.
- 의학과 한학을 배웠다.
- 1757년부터는 개업의인 마치이町医가 되었다.
- 본초학 전공자 등과 교유하며 난학에 심취
- 1756년: 네덜란드어를 배우고자 하였으나 쉽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단념.
- 1771년, 네덜란드 해부학 교과서를 실견. 해부학 도판을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함. 번에 비용을 청구하여 해당 서적을 구입.

스기다 겐바쿠가 실견한 네덜란드 해부학교과서. 해체신서의 저본이 되었다.

-1771년: 에도에서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에서 엿볼 수 있는 인체 구조가 이 책의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을 알고 감탄.
- 1775년: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 이 책이 "해체신서"다. 물론 혼자 저술한 것은 아니고 동업한 사람이 많다. 굳이 말하자면 공저자 중 1인. 해체신서는 민간출판업자에 의해 발행되었다.
- 1776년: 외과의로 새로 개업하여 대성황. 하루에 환자를 천명씩 봤다고.
- 1817년: 사망

해체신서. 민간업자인 須原屋市兵衛가 출판인이다. 한국의 의서 대부분이 관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흥미롭다. 1774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시기가 되면 이미 일본의 학문 수준이 조선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출판물의 내용이나 출판의 수준, 민간업자에 의한 출판까지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하의 상업출판 색채가 완연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때 발생한 양국간 학문 수준의 차이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많이 좁혀지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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