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병덕, 이종찬 장군은 조선에서 고보 (혹은 중학)를 졸업하고 일본육사를 진학한 사람들로, 만군을 거쳐 육사로 온 박정희 이한림 등과는 다른 경로를 걸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육사로 바로 입학한 사람들은 만군 출신들보다는 교육경력이 훨씬 심플하고 수준도 높았다.
아마 가정 환경도 그랬을 것이다.
채병덕은 평양종로보통학교-평양중학(평양고보?)-일본육사예과-일본육사본과
이종찬은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경성중학-일본육사예과-일본육사본과 이다.
이런 경력은 일제시대 당시 조선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교육경력이라 할 수 있다.
채병덕은 평양중학인지 평양고보인지 정확하지가 않은데 어느 쪽이라도 쉽지 않은 경력이고,
이종찬이 다닌 경성중학은 재조선 일본인을 위해 만든 학교였다. 조선인은 거의 들어가지 못하는 학교였는데,
이 학교가 해방 이후 일본인이 대거 빠져 나가면서 폐교되고 그 자리에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해방 전에도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는 경성제1고보 (해방 후 경기고등학교), 경성제2고보 (해방후 경복고등학교)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평양고보와 대구고보가 있었다.
이 학교들이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였다.
이 일제시대의 고보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채병덕은 6.25 당시 졸장의 이미지 때문에 뚱뚱하고 우둔한 사람으로 기억되는것이 일반적인데,
실제는 일본육사에 입학 당시 평양고보에서 성적도 최우등이고, 신체도 유도 등을 통해 상당히 잘 단련된 상태였다고 한다. 조선땅에서 일본육사를 갈 정도였다면 당연히 지적 체력적으로 최우등이었을것이다.
그가 그렇게 우둔한 사람이었는지는 사실 알수가 없다.
일제시대에 일본육사로 바로 진학한 사람들은 채병덕, 이종찬처럼 당시 연전, 보전 출신들보다도 오히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많았다.
반면 만군 출신들이 대부분 (예외는 있었다) 사범학교 등으로 간신히 고보 과정을 마친 넉넉치 않은 집안 출신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두 그룹이 서로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은 학맥이라기 보다는 사회경제적 수준 차이가 매우 컸고 이것이 해방이후 두 그룹의 진로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본다.
P.S.1) 채병덕 장군이 다닌 학교가 평양고보인지 평양중학인지 분명치 않은데 이 두학교는 다르다. 평양중학은 원래부터 일본인을 위해 만들어진 학교이고, 조선인이 적어고, 평양고보는 조선인이 다닌 학교로 일제시대 말에야 "평양제2중학"으로 바뀌었다. 인터넷의 채병덕 프로필에는 현재 이 두 학교가 다 보인다.
P.S.2) 위 이종찬 장군은 이회영 선생의 자제분으로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선생과는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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