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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제시대의 지식인: [4] 양주동 선생

by 초야잠필 2023.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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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프로필을 보면, 그 시대 구제교육제도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정리해 놓은 것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서, 

앞에 이병철 선생의 경우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조선의 고보를 졸업한 경우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대학으로는 바로 진학이 안 된다. 중졸 학력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그 다음 프로필에 대학이라고 써 있다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학 전문부일 가능성이 높다. 

대학 전문부를 나오면 고등학교 학력이 되므로 그 다음에는 물론 대학으로 진학이 가능했다. 이 경우 일본의 대학 전문부였다면 대학본과 진학도 어렵지는 않았을 것 같다. 

조선의 고보를 나온 후 바로 대학이 나와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고보를 우리가 고등학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앞에서 여러 번 썼지만 고보와 대학 사이에는 고등학교가 있었다.

조선땅에 고등학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래 나무 위키의 양주동 선생 프로필을 보자. 

1903년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나 중동학교를 마치고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문과로 전과하여 1928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위에 쓴 것처럼 중동학교를 마치면 고보와 같은 수준이므로 와세다 대 불문과에는 들어갈수가 없다.

양주동선생은 1921년에서 1928년으로 대학 재학 기간이 긴데 처음 들어갔다는 1921년의 와세다대학 운운은 학교 부설의 고등학교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백과를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아마 이 프로필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아버지 원장과 어머니 강릉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아버지,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5~6년간 한학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를 졸업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3년 잠시 귀국하여 유엽·백기만·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일제 말기에 학교가 문을 닫자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선생은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 예과에 입학했다. 

이것은 가능하다. 중동을 졸업하면 중학 학력, 그리고 와세다대 예과는 고등학교 과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와세다 본과를 올라가 동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면 비로소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양주동 선생은 중동학교에서 일본 와세다대 예과로 넘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어떤 방식으로든 경과조치가 입학 전에 부과되었을 것이다. 

식민지의 고등보통학교 학력인증기관이란 그런 것이라 상급학부에 진학하려 하면 매사에 제대로 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P.S.1) 와세다대학에는 종전 이전 대학예과를 "와세다 고등학원"이라 불렀고 2년제와 3년제 과정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결국 이 과정은 고등학교 과정이 되는 셈이다.

양주동 선생이 중동학교 졸업후 와세다를 들어가 졸업했다면 처음에는 와세다 고등학원에서 수학하고 그 후에 대학 본과로 진학했을 것이다.

양주동 선생은 와세다 입학 후 7년의 세월이 흐른 후 졸업하는데 이 기간 동안 대학예과 (고등학원)와 본과를 거쳐 수학했다면 이해가 간다.  


早稲田大学附属早稲田高等学院

第一部(3年制) → 第一早稲田高等学院 - 文科・理科(現在の戸山キャンパス)

第二部(2年制) → 第二早稲田高等学院 - 文科(現在の早稲田キャンパス内、1942年度から3年制に移行)

戦後、代替校として早稲田大学高等学院が設立

앞에서 이병철 선생과 관련하여 와세다 전문부 이야기를 했었는데 고등학원은 또 다른 고등학교 과정으로 와세다에는 "대학예과"가 "전문부"와 달리 또 있었던 셈이다. 

P.S.2) 앞서 양주동선생의 프로필을 보면 와세다 입학 후 (1921년) 2년 있다가 일시귀국을 하는데 (1923년) 필자가 보기엔 이 2년 동안 선생은 대학 예과를 다녔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것이 1928년이었다 하므로 대학이 3년제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시기는 1924년이나 1925년 경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한국에 귀국해서 체류한 기간은 약 1-2년 이니 잠시 귀국한 것이 맞는 셈이다.

이 추측이 맞다면 양주동 선생은 최초의 도일에서는 예과를, 다음 유학에서는 본과를 마친 셈이겠다. 


전문부와 달리 또 다른 고등학교 과정이었던 "와세다 고등학원". 양주동 선생은 이곳을 거쳐 와세다 본과로 입학했을 가능성이 높다.

 

*** previous article *** 

 

일제시대의 지식인: [3] 이병철 (ft: 데츠카 오사무)

 

 

일제시대의 지식인: [4] 양주동 선생

일제시대 프로필을 보면, 그 시대 구제교육제도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정리해 놓은 것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서, 앞에 이병철 선생의 경우에서도 예를 들었지만, 조선의 고보를 졸업한 경우

historylibrary.net

 



*** Editor's Note ***

앞 이병철도 그렇고 양주동 건도 같아 내가 補해야 하지만 여력이 없어 뒤로 미룬다. 신 선생께서 이르기를

양주동 선생은 중동학교에서 일본 와세다대 예과로 넘어가는 과정이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 과정이 바로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어떤 방식으로든 경과조치가 입학 전에 부과되었을 것이다.


라 하거니와 양주동은 1년 속성 과정으로 중동을 졸업했다.

신 박사 말대로 와세다대는 예과로 먼저 들어가 3년만에 졸업하고 불문과 들어갔다 영문과로 전과해 졸업했으니

그 어중간들에 시 동호지 금성 창간과 동경대진재 같은 일들이 섞여 약간의 혼란을 준다.

문주반생기를 비롯한 무애 글들에 저와 같은 편린들이 보인다.

호암은 호암자전이 기본 필수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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