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 선생은 일전에 한 번 살펴 본 바 있으나 여기서 한 번 더 자세히 적어본다.
선생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했다. 1912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쳤으며, 이어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 고등예과(高等豫科)를 거쳐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했다.
요약하면:
한성보광보통학교-중동학교-보전 법률학과 (1915)-와세다대 고등예과-동 문학부 사학 및 사회학과 졸 (1919)이다.
중동학교는 고보 (중학) 졸업이니 보전 입학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어 와세다대 고등예과를 들어갔다고 한다.
선생은 보전 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과 같은 학력을 얻었기 때문에, 예과를 들어갈 필요는 없었는데 고등학교 졸업생이 들어가는 "선과생"대신 고등예과를 들어갔다고 했다.
고등예과란 무엇일까?
일본어 위키에 답이 있다.
1899年(明治32年)3月 - 高等予科(現:早稲田大学高等学院)を開設。
라 되어 있으니 고등예과는 와세다대 고등학원과 같은 것을 알수 있다.
이어서
1922年(大正11年)3月 - 高等予科廃止。第二高等学院校舎(のちの13号館)竣工。
로 되어 있다.
고등예과가 와세다대 고등학원으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고등예과란 와세다대의 예과=고등학원이 1922년 이전까지 불리던 명칭이었다고 본다.
이 고등학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학과정을 마친 후 진학하는 고등학교 과정으로,
양주동 선생이 중동을 마친 후 도일하여 처음 다녔으리라 생각하는 "예과"와 동일한 것 같다.
사실 이병도는 양주동과는 달리 보전을 졸업한 상태였으므로 예과를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
굳이 이 예과를 거쳐 와세다대 본과를 졸업한 것을 보면, 혹 본과 진입 전 경과조치로 대학 측에서 선생에게 부과한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이병도 선생은 와세다대에서 총 4년을 재학했던 것 같은데,
원래 와세다 본과는 3년이므로, 고등예과=고등학원=예과의 재학 기간은 1년이었을 것 같다.
원래 예과가 2년 과정인 것을 생각하면 선생이 이미 보전을 졸업했던 것을 감안한 것 아닐까 하는데
이병도 선생의 경우 도일한 시기가 너무 일러 30년대를 기준으로 파악하고 있는 필자가 완벽히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병도의 경우, 와세다 졸업 후 조선에 귀국해서는 뚜렷한 스승이 없었다.
대학 연구실에 소속되어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혼자 독학하다시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선인 학자를 모아 진단학회를 만들어 이를 토대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생각보다 많이 외로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문을 보면 진단학보를 거의 이병도 선생 개인의 노력으로 끌고 간다는 찬상이 많이 보이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흔히 선생에 대한 비판에서 그가 일본의 식민사학자들을 추종했다는 글을 보는데,
그의 글에서 그런 편린이 보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프로필 상에서는 일본의 식민사학자와 사제간으로 연결될 고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 쓴것처럼 이병도는 일제시대 내내 아웃사이더였고, 그가 한국사학의 태두로 떠오른 것은 해방 이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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