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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일제시대 아웃사이더

by 초야잠필 2023.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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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일제시대 조선 학계의 상황 전반과 관련된 일인데

정도의 차는 있지만 일제시대 학계마다 조선인은 거의 아웃사이더였다. 

전술한 역사학의 경우 해방이후 서울대 국사학과의 주축이 되는 조선인학자들은

예외없이, 거의 모두 일제시대에는 아웃사이더였다. 

지금이니 양자를 대척점에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 일제시대 당시에는 조선인 학계란 일본인 교수들 입장에서 치지도외였을 것이다. 

이병도 등 사학자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이것도 아닌 소위 국학을 연구하는 양반들 이야기는 그러니 제대로 먹힐리가 없다. 

조선인학자들이 발표할 지면은 조선, 동아 등 신문을 빼면 아마 진단학보나 각종 동인지 정도가 전부아니었을까. 

이것은 의학도 그렇다. 

경성제대 의학부, 경성의전 등이 거의 일본인 교수들이었기 때문에 의학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자들은 전문학교로 밀려나 있거나 거의가 개업을 했다. 

이 양반들이 해방이후 일본인들이 물러난 자리를 차지하여 한국학계의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도 일본학자들과 부화뇌동한 친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과 많이 다르다. 

이 지면에 몇 번은 쓴것 같지만, 해방과 일본제국의 패망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계층이 바로 이들, 지식인 계층이었다. 

이병도 선생 프로필을 보면, 

1910년대 보전졸업과 와세다대 졸업 후에는 이렇다 할 보직이 없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어마어마한 자리로 포장하는데 앞에도 썼지만 내가 보기엔 이 자리는 책이나 쉽게 보자고 이름 걸어 놓은 자리인 듯하다. 

대학강사 출강 경력도 있지만 거의 전임이 아니었던 듯 하고, 그래서 조선 동아 등 지면에는 이 양반 소속을 "진단학회"로 하여 "진단학회 이병도씨"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학회가 직장이 된 셈이다.

이병도 선생은 해방이 10년만 늦었으면 아마 지금은 이름도 못듣게 되었을 것이다.

해방되었을때 이 양반 연세가 49세였다. 

이 양반이 일제시대 일본인 교수의 촉망받는 제자였던 것처럼 써놓은 글도 온라인 상에 많은데, 

그게 아니라 이 양반은 와세다대 졸업후 일정한 스승이 없던 사람이었다. 1920년 이후 거의 독학으로 성장했다. 

이병도 선생이 해방이전 최종학력이 와세다대 학사로 박사학위도 해방이후에 자신이 교수로 재직 중인 서울대에서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양반은 일제시대 말기에는 거의 "재야사학자"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왜 두계가 1940년 당시 "일반인에게도" 경성제대 도서관을 열어달라는 이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조선인 지식인층은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사회의 주류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이를 억지로 친일의 대열에 끼워놓는 경우를 보는데 사실에 입각하여 치밀한 검토 후 필요하다면 정정해야 할 것이다. 

 

사진은 백인제 선생.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의전출신으로는 드물게 동경제대 의학박사를 받았지만 해방 전에는 개업의였다. 개업의로도 크게 성공하여 백병원을 만든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의대 외과학교수가 되지만 6.25때 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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