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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70세 자화상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이 양반 올해 탄신 300주년이라 해서 여기저기서 관련 기념행사를 했거나 하거니와,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라 일컬었다는 이 양반, 자기 자랑 증세가 심했으니 그의 글을 엮은 《표암유고豹菴遺稿》를 보건대 석가재夕可齋 이태길李泰吉이라는 친구가 금강산에 유람하러 떠날 때 그에게 써 준 글이 있으니 이 글 첫 대목은 이렇다.
"내 친구인 석가옹이 중랑中郞 원굉도袁宏道(1568~1610)의 유람기를 읽고는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글이 표암의 단편들에 미치지 못하니 볼 만한 게 무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뒤에 이어지는 문장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나 강세황의 글이 당대 중국 문단의 총아요 월드스타인 원굉도보다 낫다는 자네 평가는 말도 되지 않으니 앞으로 헛소리하지 말고, 금강산이나 잘 구경하고 오라는 말이 따를 수밖에 없다.
왜 이 말을 했겠는가? 이태길이 표암을 상찬한 말이 어떠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요, 더구나 그것을 문서화한 것도 아닐진대 굳이 이런 말을 강세황이 남긴 까닭은 지 자랑하기 위한 묘책이다.
어제 올린 책 사진 중에 지만지 총서에 포함된 《원매袁枚산문집》이 있다. 백광준이라는 분이 번역하고 설명을 단 청대 중기의 기린아 원매가 남긴 글 중에서도 말 그대로 산문만을 골라 번역했다.
강세황 초상화
예정대로 되지 않던 선도봉 유람을 원매가 우씨 집안 사람들과 우연히 알게 되어 마침내 유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낮에 우씨 집안 사람들과 만나 명함을 던져주고 숙소로 돌아와 머물 적에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옷을 벗고 잠을 청하려는데 문밖에서 두런두런 사람소리가 들려왔으니 다름아닌 우씨 형제였다. 그는 '헤어진 뒤에 명함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원매 선생이신가요?'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는 그는 곧 손에 든 등으로 위아래를 비쳐보더니 이랬다.
'저희들이 어려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는 국초國初의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연세가 백수십세가 되어야 할 터인데 지금 신수가 이러하시니 옛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요...하략"
간송미술관 소장 표암 강세황 물외한거物外閑居
나는 어떤 식으로 내 자랑을 해볼까나?
강세황이나 원매의 시대에 페북이 있었다면 생각해 본다.
좃또버그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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