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잡곡농경을 무슨 화전민 농경처럼 보게된 것은 일본 탓이 크다.
일본에서는 대륙으로부터 도작과 잡곡이 거의 동시에 전해졌고,
위도가 우리보다 낮은 탓에 도작 비중도 우리보다 훨씬 높았다.
따라서 마치 청동기와 철기가 비슷한 시기에 전해져 청동기라는 구분이 일본사에서는 쉽지 않았듯이
잡곡 농경 역시 도작과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전해져 별도 잡곡농경문명을 설정하기 곤란한 것이 일본사다.
물론 최근에 초보적 식물재배가 조몽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 일본 측 주장이지만,
우리가 말하는 잡곡농경이란 그런 초보적 수준이 아니라
황하문명을 낳은 것과 같은 본격적인 것으로서의 잡곡농경을 말한다.
한국도 이러한 일본 시각 영향을 받아 도작 이전 잡곡농경을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으로 시각이 있는데,
최근 나오는 잡곡문명론에 대한 논문들을 보면,
요서를 기원으로 한 잡곡문명의 기원이 너무 오래되어
도작과 구분되어 완성된 형태로 자리잡은 역사가 오래되며
이러한 잡곡농경의 여파가 부여 고구려 문명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바로 이 잡곡농경이 매우 이른 시기에 한반도에 전해져 들어왔다는 추정이 과연 전혀 가능하지 않은것인지 의문이다.
한반도에 도작 이전 이미 완성된 형태 잡곡문명이 있었는가?
아니면 통설처럼 청동기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완성된 본격적 농경 (여기서는 십중팔구 도작을 말한다)이 시작된 것인가?
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논의 결과 우리는 잡곡농경이 제대로 된 것이 없고
쌀농사부터 진짜 농경의 시작이라고 다시 결론짓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논의는 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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