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라 해서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외국인이라 해서 유별나게 총애 받아 출세한 인물도 많다.
고려시대의 경우는 외국인 특례 채용이 아주 많았으니, 이는 조선시대랑 비교할 적에 유별난 고려시대 특징으로 꼽히기도 하니, 설레발하기를 고려가 국제성을 지향한 사회라나 뭐라나?
처한 시대상황이 그리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하지 않고선 살 수 없는 시대였을 뿐이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무대가 되는 바로 그 고려 현종시대에도 저런 식으로 발탁되어 출세한 인물이 있으니, 주저周佇라는 사람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 제7 제신諸臣에는 아예 저 사람 전기를 별도로 세워 그 행적을 정리했으니 아주 짧아서 전문을 인용한다.
주저周佇는 송宋나라 온주溫州 사람이다. 목종 때 상선商船을 따라 왔는데, 학사學士 채충순蔡忠順이 그가 재주가 있음을 알고서 긴밀히 왕에게 아뢰어 그를 머물게 하였다.
처음에 예빈성주부禮賓省注簿로 임명했다가 몇 달도 안 되어 습유拾遺로 임명하였고, 마침내 제고制誥를 맡겼다. 현종顯宗이 거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할 때 주저가 호종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이로 인해 크게 현달하여 단계를 뛰어넘어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禮部侍郞中樞院直學士로 옮겼다.
내사사인 비서감 우상시 內史舍人秘書監右常侍를 거쳐 한림학사승지 숭문보국공신 좌산기상시 상주국 해남현개국남 翰林學士承旨 崇文輔國功臣 左散騎常侍 上柱國 海南縣開國男으로 봉해졌고,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으며, 얼마 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승진했다가, 〈현종〉 15년(1024)에 죽었다.
성품은 겸손하고 공손하였고, 문필에 능하여 외교문서[交聘辭命]가 그의 손에서 많이 작성되었으므로, 은총과 대우가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서 우리가 주목할 데가 많은데 그가 위선 온주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온주는 지금도 절강성에 그 이름이 남은 해변도시로 고려시대에는 그 북쪽 같은 항구도시 영파와 더불어 해상무역이라고 하면 거개 이쪽 출신자들이 독점했다.
당시 고려가 송으로 통하는 항로는 크게 이 두 가지가 있어 송이 개봉에 도읍할 때는 보통 산동성을 통해 들어갔고 남송 시대에는 영파를 통해 들락했다.
다만 시대를 통괄해서 저쪽 절강성 주변 일대 상인들이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주저는 그런 상단 출신이었다.
아마도 회계장부라든가 문서를 관장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에서 채충순한테 눈에 띠어 그가 왕한테 몰래 말을 해서 발탁한 것이다.
이를 왜 채충순은 몰래했을까? 이미 쌍기 이래 외국인 특례채용이 많았고, 그에 따른 고려사회 내부의 반발 또한 무시하지 못할 만치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또 외국인? 하는 의구심 혹은 눈초리가 어느 때보다 큰 때였다. 그런 까닭에 저런 방식으로 비밀리에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초임지는 예빈성주부禮賓省注簿, 간단히 말해 예빈성 문서 담당이었다는 뜻인데, 이 예빈성이 오늘날 외교부다.
그러다가 문한을 관장하는 습유拾遺를 거쳐 제고制誥로 갔다 하니 결국 세 치 혀로 출세했음을 본다.
간단히 말해 그는 글을 잘 쓰는 기자였으며, 연설홍보관이었다.
그런 그가 훗날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출세하는 발판을 마련하니, 끝까지 왕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지근거리에서 보필한 공으로 쌍기도 이루지 못한 출세가도를 달린 것이다.
예서 궁금한 점은 그의 고려말 실력.
그는 분명 중국인이었고, 중국어 중에서도 광동어를 모국어로 쓴 사람인데, 그가 어느만치 고려말을 익혔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초창기에는 통역을 통했겠지만, 계속 통역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느 정도는 고려말을 익혔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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