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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곽원과 왕가도, 거란 선제공격을 주장한 매파(1)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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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itans eating. Tomb mural, Chifeng city, Inner Mongolia

 
시종 거란과 치고받기를 계속한 고려 현종 시대에 하도 고려도 당하다 보니, 거란을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매파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곽원郭元과 왕가도王可道 역시 그에 속한다.

이 중에서도 왕가도는 이름이 재미있는데, 보나마나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하는 도자 도덕경 구절에 따왔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저 둘은 현종시대 다른 저명한 관료들과 더불어 고려사 권94 열전 권 제7 제신諸臣에 나란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먼저 곽원을 본다.

그는 청주淸州 상당현上黨縣 사람이니 한명회 까마득한 고향 선배가 된다. 성종 15년(996)에 갑과甲科에 급제한 후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현종(顯宗) 2년(1011) 중추직학사中樞直學士가 되었으니 주로 문한 분야에서 활약했음을 본다.

현종 6년(1015)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을 버리고 송을 다시 섬기겠다 했지만, 당시 송이 이를 받아들일 처지가 아니었으니 소기한 성과를 달성치 못하고 귀국했다.

이듬해에 형부시랑 우간의대부刑部侍郞 右諫議大夫가 되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예부시랑 한림학사禮部侍郞 翰林學士를 거쳐 현종 13년(102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와 중추사 형부상서中樞使 刑部尙書를 지내고 추성문리공신推誠文理功臣에 봉작되었다가 현종 18년(1027)에는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된다.

현종 20년(1029) 흥요국興遼國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토벌에 거란이 원군을 요청하니 이 기회를 빌려 압록강 동쪽에 자리잡은 거란 성채를 무력으로 탈취하자 주창했다.

이런 강경 방침에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이 떼거리로 반대했지만 밀어부쳐서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하자 부끄러움과 분노로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 열전은 적었다. 
 

거란 최전성기

 
그를 일러 열전은 “성품이 청렴하고, 글을 잘 지으며, 대성臺省의 지위를 역임하여 관리로서 유능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자중하지 못하고 이작인李作仁 같은 자와 친하게 지내니 사람들이 이 때문이 그를 싫어하였다.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곽원이 공로가 있으므로 아들 곽증郭拯을 발탁하여 등용하였다”고 했다.

이로 보아 압록강 동쪽 일부가 당시에 여전히 거란 수중에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것이 고려로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음을 본다.

그의 의도대로 성공했을 때는 한껏 기세가 올랐겠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이 반대하는 일이 성공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고, 무엇보다 그것이 실패할 경우 그것을 밀어부친 사람이 짊어져야 할 몫은 평소보다 몇십배였으니, 결국 울화통으로 죽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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