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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충성심 하나로 정승까지 승진한 군인 지채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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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지채문智蔡文은 오직 왕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지근거리에서 현종에 각종 간난에 처했을 때 혈혈단신으로 그를 옹위하는 모습을 보인다.

실제 역사가 기록한 지채문 역시 그러해서 심지어 강감찬에 대해서도 각종 상상력을 동원해 영웅을 만들려하지만, 오직 지채문만큼은 한치 역사 기록과 어긋나지 않은 모습으로 시종일관 그린다. 

진짜로 그랬다.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그는 그 직접 전장 반대편인 동북면을 지키는 임무가 주어졌으니, 이는 보나마나 여진을 방비하고자 함이었으니,

그런 와중에 서경이 함락 당할 위기에 처하자 왕명에 따라 동북면 병사들을 이끌고 서경 구원에 나섰으며,

각종 배신으로 곤란에 처하고 마침내 현종이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파천하자 말머리를 급히 돌려 왕을 따라 잡아, 끝까지 우직하게 왕을 호위했으니, 지채문이 없었던들 현종은 목숨조차 담보할 수 없었다. 

전란이 겨우 가라 앉고, 또 개경으로 환도한 뒤 현종은 재위 2년 1011년 2월에는 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 위관급 장교쯤 되는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던 지채문한테 토지 30결結을 하사하면서 그 교서에 이르기를

“짐이 도적을 피하다가 먼 길 위에서 곤경에 빠졌을 적에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라고 했으니 진짜로 그랬다. 

이런 그였기에 그는 김훈 최질이 주도한 막부 쿠데타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끝까지 왕을 지켰다. 

이런 그가 훗날 현종 7년, 1016년에는 무관임에도 우상시右常侍를 겸하더니, 현종 17년 1026년 4월에 이르러서는 우복야右僕射로 승진하니, 무신으로 문신이 독점하는 재상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는 출생시점을 모르지만 사망시점은 좀 묘해서 고려사 그의 열전에 이르기를 17년(1026)에 우복야를 지내다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이때 죽은 것인지 아니면 저런 자리에 올라 일하다가 어느 시점에 죽었다는 것인지는 단안할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에는 관례상 고관이 죽을 무렵에는 승진을 시켜주는 주는 점을 고려할 때는 죽을 때가 되어 저리 승진케 했을 수도 있다. 

이미 덕종 시대가 개막한 현종 22년, 1031년 11월 “죽은 좌복야左僕射 지채문智蔡文은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顯考-현종]께서 남쪽으로 피난하실 적에 호종하였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 마땅히 공적[功科]을 기록하여 후세를 장려해야 한다.”

는 덕종의 교서가 나온 것으로 보아, 좌복야는 아마도 죽은 뒤 어느 시점에 추증된 관직이 아닌가 한다. 

그는 왕건 개국기를 제외하고는 문민정치가 확실히 자리잡은 고려전기에 쿠데타가 아닌 코스로 재상 반열에 오른 희귀한 무관이다.

이런 점에서 지채문이라는 이름은 대서특필되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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