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54년 음력 3월, 신라 제28대 왕 김승만(金勝曼)이 재위 8년 만에 죽으니, 이를 흔히 진덕왕(眞德王)이라 한다.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서는 그가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는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고, 진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3백 필을 내려주었다"고 하거니와, 이제 문제는 차기 대권이 누구한테 가느냐였다.
그의 죽음이 실로 묘한 까닭은 죽음에 대비한 후사 문제를 전연 정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이 수상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곡절을 따지면 그럴 만한 사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승만의 죽음으로 신라에는 이제 신분으로 보면, 그때까지 왕위를 독점한 성골(聖骨)이 씨가 마른 까닭이다.
이런 사정을 같은 진덕왕본기에서는 "나라 사람들이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했다"고 했으니, 이젠 진골이 왕위에 오르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는 왕위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신라 스스로를 속박한 악재였다. 왕위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고 그 범위가 넓을수록 왕위를 꿈꾸는 자가 준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민에 봉착한 신라는 모든 관위를 초월하는 절대의 존재로써 성골이라는 신분을 상정하고, 그것을 개념화하고는 적어도 왕위만큼은 성골이 독점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하지만, 독점은 언제나 무너지지 마련이며, 더구나 그 폐쇄성은 언제건 성골 자체의 씨를 마르게 할 우려가 있었으니, 마침내 그런 사태가 초래한 것이다.
이제 문제는 차기 대권을 누가 거머쥐느냐였으니, 나아가 그와 더불어 그런 대권을 누가 결정하느냐로 모아졌다. 이때 신라 조정 권력 분포도를 보면, 절대의 강자가 김유신이었다.
그는 진덕왕시대 내내 군부의 실력자였을뿐만 아니라, 정권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진덕이 막 즉위하던 그때, 또 다시 여자 군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비담(毗曇) 일당이 명활성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은 그 진압 총사령관이 되어 비담 일당을 일망타진했으니, 《삼국사기》에서는 그에 연루되어 비담을 비롯해 물경 30명이 목베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신라에서는 공포정치가 막이 올랐으며, 그 정점에서 김유신이 위치했다. 김유신은 진덕왕시대 보안사령관이었고 수도방위사령관이었다. 절대권력자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영리했던 까닭은 적어도 권력을 겉으로는 분점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원로 대신 알천을 상대등으로 내세워 권력을 독점한다는 화살을 교묘하게 피해갔으며, 그 자신은 외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진덕왕시대 그가 차지한 외직은 중앙과 뗄 수가 없었다. 진덕왕 재위 초반기에는 계림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압독주 군주로 나간 그는 백제와 전투가 날로 격렬해지자, 이내 상주를 관장하는 대총관이 되어 백제전을 진두지휘한다.
이 무렵 김유신은 그야말로 계림 집에 들를 겨를이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렇게 야전으로 철저히 단절된 군인이 79세로 장수했다는 사실도 실은 경이롭기만 하다.
김승만이 죽었을 때, 신라의 절대권력자는 김유신이었다. 따라서 왕위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실은 김유신이었다.
학계에서는 상대등이라는 관직을 침소봉대해서, 나아가 신라 하대 몇 명이 상대등으로 바로 왕이 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당시 상대등 알천의 권력을 침소봉대해서, 그가 권력자였다느니, 귀족회의 대표였다느니, 혹은 진덕왕 사망 직후 그를 섭정으로 추대하려는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알천이야말로 김유신 김춘추로 대표하는 신진 권력에 대항하는 귀족회의 대표자였다는 식의 주장이 버젓이 횡행하나,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알천은 김유신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그 방패막이로 내세운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권력은 김유신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승만 이후 왕위는 당연히 김유신의 의중이 결정적이었다. 김유신이 누굴 찍느냐에 따라 후계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 즉위년 조에서는 "진덕이 돌아가시자 여러 신하가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했지만,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고 묵직하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만한 뛰어난 인물이라 할 만합니다”고 하니,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고 했거니와, 이는 김유신이 기획한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젊은시절 그 누이를 시집보냄으로써 처남매부 사이가 된 이래, 그의 후견인이 된 김유신에게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절대권력자 김유신의 힘은 여러 군데서 뒷받침되거니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中에서는 당 고종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眞德大王)이 薨하자 "유신이 재상인 이찬 알천(閼川)과 의논해 이찬 춘추(春秋)를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 사람이 바로 태종대왕(太宗大王)이다(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飡謀 迎春秋伊飡 卽位 是爲太宗大王)"고 했으니, 김춘추를 왕위로 밀어올린 이가 김유신임을 폭로한다.
알천은 그런 김유신 독단의 결정을 공론이라는 형식으로 추인하는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다.
나아가 《삼국유사》 기이편 '진덕왕(眞德王)' 조에서도 왕이 즉위한 시대에 알천공(閼川公)·림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다)·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어 이들이 남산(南山) 우지암(亏知巖)이란 곳에 모여 국사를 논의했거니와, 이 논의에서 호랑이도 맨손에 때려잡은 알천은 "완력이 이처럼 세서 그를 윗자리에 앉혔지만 모든 이는 유신공의 위엄에 심복했다"고 했거니와, 이 역시 이 모임을 주도한 절대권력이 김유신임을 폭로한다.
알천을 윗자리에 앉힌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이들 중에서도 최고 연로자였기 때문이지, 그의 권력이 강하기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견주건대 김유신은 12.12사태 직후 보안사령과 전두환이요, 알천은 최규하였다.
이제 다음호에서는 신라 진덕왕본기가 실은 김유신본기임을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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