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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雜談

정조 앞에서 활쏘기 힘 자랑하고 고통없이 간 오재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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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함께 활쏘기 후 잘했다고 받은 종이 쪼가리.

"후과後課 선물은 나중에 준다." 

'훗, 왕 앞에서 잘 쏴봤자 정조 뒤끝 쩔구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종이쪽을 받은 사람을 보니 오재순吳載純(1727~1792)이다. 오재순이 궁금해져 찾아보니 현종의 딸이자 숙종의 누이인 명안공주의 손자다.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와 주고 받은 애틋한 한글 간찰의 주인공이자, 마누라 세 번 갈아치우는 동안에 사람 목숨은 몇십 배로 갈아치운 남자 숙종이 '하지만 내 누이에게는 따뜻하겠지'를 시전하며 각종 살가운 선물을 남발한 대상이 명안공주다.  

그녀가 해주오씨 집안에 시집간 덕에 오재순은 그 손자로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명안공주의 후사가 없어 부친 오원이 양자로 들어간다) 친할머니는 김창협의 딸이고 장인은 영조 때 재상 이천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음서로 6품에 올랐지만 본인도 노력하여 46세(1772)에 급제한다. 

이후로는 승승장구하여 1783년 부사로서 연경에도 다녀오고(이때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 이승훈이 따라가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땅에 천주교를 전파한다) 이후에는 내내 홍문관 대제학을 맡는다.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君師父일체'를 넘어 '萬川明月의 주인'을 자처한 사람이 아닌가. 

다른 왕들의 경연이 '스카이캐슬 김주영 쓰앵님 같은 재상+문한 그룹의 쪽집게 과외'라고 한다면 정조의 경연은 '학번도 늦은 지도교수 앞에서 늦깎이 학생들이 발표하는 세미나 수업' 같은 분위기다.

더구나 그 어린 지도교수가 바로 봉급 주는 회사 사장님이고 심지어 왕이다. 선생과 학생이 뒤바뀐 것 같은 당시 경연 담당자가 대제학 오재순이었다. 이런 수업 조교하려면 고생 꽤나 했을 거다. 

 

오재순

 

정조의 조정에서 文衡을 지냈다는 것만 보아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며 정조 역시 그를 총애하여 65세인 1791년에 화원 이명기를 시켜 그린 초상이 남아 있다. (보물 제1493호, 리움 소장)

그리고는 66세 때인 1792년 12월 16일에 왕과 함께 활을 쏘았는데 노익장을 과시하며 받은 "古風"이 이번 전시 유물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오재순의 생몰년이 이상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정조 16년) 12월 30일 <실록> 기사에 오재순의 졸기가 실렸다. 

"...이때 와서 앓은 일도 없이 죽자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갔다고들 하였다.(至是, 無疾而卒, 世稱仙化。)" 

고령의 노인이 한겨울에 활 쏘고 보름만에 이승을 떠난 것이다. 

정조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저 노인네 오늘내일 하는데도 한겨울에 무리하는구만? 선물은 나중에 준다고 해야지.' 

고로 "後課"라고 썼다. 

#古風 #오재순 #조선왕실군사력의상징_군사의례

 

***

 

3년 전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의 군사의례>를 보고 쓴 글.

명문가에 총신이어도 국왕이 까라면 까야 한다.

건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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