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隋) 제국 마지막 황제인 황태주(皇泰主)는 글자 그대로는 ‘황태皇泰’라는 연호를 쓴 왕조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수 제국 마지막 황제지만, 실은 허울에 지나지 않은 꼭두각시였다. 본명은 양동(楊侗), 죽은 뒤에 얻은 이름인 시호諡號는 공황제(恭皇帝)였으니, 황제 시호에 ‘恭’자가 들어간 글자 치고 끝이 좋은 이가 없다. 604년, 수 제국을 개창한 문제(文帝)의 증손이면서, 2대 황제 양제(煬帝)의 손자로 태어나 619년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618년 6월 22일 이래 이듬해 5월 23일이니, 11개월 남짓하다. 재위 기간 황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이니 그의 둘째 아들이다. 어미는 소유량제(小劉良娣)다.
사약 마시는 단종. 연합DB
양동은 월왕越王에 책봉되어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러다가 618년 4월 11일, 양제煬帝가 우문화급(宇文化及)한테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소식이 동도에 전해진 뒤인 같은 해 5월 24일 무진일에 이 일대 실력자 왕세충(王世充)이 원문도(元文都), 노초(盧楚) 등과 더불어 황제로 옹립하니, 이에서 그를 황태주皇泰主라 일컫는다.
황제 취임과 더불어 왕세충을 이부상서吏部尚書로 삼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했다. 세충과 더불어 진국공陳國公 단달段達, 내사령內史令 원문도元文都, 내사시랑內史侍郎 곽문의郭文懿, 황문시랑黃門侍郎 조장문趙長文, 내사령內史令 노초(盧楚), 병부상서兵部尚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하며 국정을 장악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칠귀七貴’라 불렀다.
하지만 왕세충이 전횡하자 공신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원문도가 세충을 암살하려다가 그 계획이 단달段達에게 누설되고 이를 통해 세충에게 역습을 받아 패몰했다. 원문도는 죽음 직전 황태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오늘 아침에 죽습니다만 폐하는 저녁에 그리 될 것입니다”고 하니 황태주 역시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가 황태(皇泰) 2년 4월 초 계묘일에 마침내 왕세충에게 밀려 폐위되고 함량전(含涼殿)으로 유폐됐다. 그 이틀 뒤 왕세충은 “대정황제大鄭皇帝”라 자칭하고는 “개명開明”이라 연호를 확정하고는 황제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황태주 양동을 격하해 노국공(潞國公)으로 삼으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양동은 부처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5월에 이르러 배인기(裴仁基)와 배행엄(裴行儼) 부자가 왕세충을 시해하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화근이 양동에게 있다고 판단한 왕세충에게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해 6월, 왕세충은 조카 왕인(王仁)과 가복家僕 양백년(梁百年)을 황태주 처소에 보내 짐독으로 죽음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황태주는 왕세충이 나중에 황제 자리를 돌려준다는 약속을 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게 남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황태주는 짐독을 마셨지만, 죽지 않자 목졸림을 당해 생을 마쳤다. 죽음에 이르러 황태주는 향을 사르고 예불하면서 “부디 제왕의 존귀한 가문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이때가 겨우 1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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