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읽다가>
세종대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16년째 되던 1434년 4월 11일, 왕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김인金裀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원숭이[獿子]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이게 하여, 지금의 목사 이붕李鵬에게 전해 주고 왔는데,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육지에 가져오게 할 것은 없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든지 와서 주의하여 먹여 기르겠다면 육지로 가지고 나와서 풀이 무성한 섬[島]이나 갯가에 놓아 기르게 하되, 혹시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잡아 가지 못하게 하고 힘써 번식하도록 하라."
이를 보면 제주목사가 제주에서 야생원숭이를 잡아 길들여서 후임자에게 인수인계까지 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에 원숭이가 진짜 살았을까?
기실 부여의 특산물 중 '원숭이가죽'이 보이고, <삼국유사> 같은 데도 원숭이 얘기가 가끔 나오며, 고려시대에는 고관들이 자기 집에서 원숭이를 기르기도 했다.
우리네 조상한테 원숭이가 영 낯선 동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동북아시아 삼국 중 중국과 일본엔 원숭이가 많은데 우리나라만 없다는 것도 좀 희한한 일이기는 하다.
과연 제주에 야생원숭이가 살았을까.
이로부터 2년 뒤, 제주 안무사 최해산(최무선 아들)이 원숭이와 노루 한 쌍씩을 바쳤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전한다.
노루야 지금도 제주에 더러 있지만 원숭이는?
일본이나 유구국과 교역하며 얻은 게 아니라면 야생원숭이를 잡은 것이라는 말밖에 안된다.
참고로 이때 최해산이 바친 원숭이와 노루는 궁중에서 잠깐 기르다가 인천 용유도로 보내 놓아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용유도에 그 친구들 후손이 남아있지는 않은 것 같다.
*** Editor's Note ***
이중환의 택리지중 팔도론/충청도 편에 보이는 다음 구절은 그 의아함이 있어, 이를 전문으로 탐구한 안대회 선생 글도 있다고 기억한다.
"명나라의 양호楊鎬는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데리고 소사하素沙河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매복하게 하였다. 원숭이는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쳐다만 보았다. 혼란에 빠져 조총 하나, 화살 하나 쏴 보지도 못하고 크게 무너져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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