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송白松의 또 다른 면모>
앞서 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1851-1921)이라는 서화가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요즘 데이터베이스가 잘 되어있다 보니 여러 가지 사실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앞선 글은 이 글 맨 아래에 첨부하니 참고바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그가 수연 박일헌처럼 1880년대 조-청 국경분쟁과 백두산 정계비 문제에 꽤 깊이 관여한 듯한 정황이 보인다는 것이다.
1909년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光緖 13)의 감계勘界 담판 때 한국 위원의 수행원이었던 전前 무산군수茂山郡守 지창한池昌翰을 조치하여 당시의 정황, 특히 이중하李重夏가 1885년 담판에는 강경론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1887년에는 茂山에서 하류의 豆滿江을 국경으로 하는 것에 동의한 사정 및 土堆·石堆의 종말 점 紅土水源에 연접했다고 말하는 木柵의 유무 등에 관해 상세한 조사를 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2년 앞서 1907년, 통감부 간도파출소에서 소네 아라스케 부통감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당시 수행원이었던 자이며 지도를 작성하는 임무를 담당한 茂山 전 郡守 池昌翰이 스즈키鈴木 文學士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본인도 지도 제작 시 누차 청국병에게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부상당하였다고 하면서 지금까지도 그 형적으로 왼쪽 손톱을 내보였다고 하였음.
사진이 바로 그 보고서다. 왼쪽에서 3째줄을 보면 同人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번역에서는 이걸 日人으로 보고 '일본인도 지도 제작시....'로 풀었다.
그나저나 얼마나 맞았길래 손톱에 그때까지 흔적이 남아있었을까? 혹 손톱이 뽑혔던 걸까?
그랬다면 그림 그리는 데 큰 지장은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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