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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조선시대 농민의 눈물이 만든 보

by 초야잠필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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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블로그 김단장께서 쓰신 글을 보면 흡사 조선시대 문사가 재림하여 쓴 거 같은 생생한 내용을 보는데 바로 전 포스팅한 글이 그렇다.

김단장 선친께서 농사 짓는데 고생하신데 관해 보에 대해서 쓰신 바 이것은 조선시대 전공자들이 현재까지 밝혀낸 바와 정확히 일치하는 이야기다.

최근 조선시대사 연구자들이 밝혀낸 바는 필자가 아는 한 다음과 같다.


1. 우리나라는 모내기가 쉽게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모내기만 할만하면 봄 가뭄이 꼭 드는지라 모내기 한다고 하다가는 잘못하다가 한 해 농사 다 망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모내기를 하면 노동력이 절약되고 수확이 올라가는 그 장점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멀쩡히 잘 도입되던 모내기가 우리나라에서는 일종의 도박처럼 취급되었다. 모내기에 성공하면 대박 터지지만 실패하면 한해 농사 망해서 쪽박차는 위험천만한 사행성 산업으로 간주되어 조선왕실에서는 상당기간 모내기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이 당시 이미 중국 강남지역과 일본은 모내기를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생산성에 있어 비약적 도약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2. 우리나라에서 모내기가 성공한 것은 바로 삼남지방에 보가 대대적으로 도입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이 보가 김단장이 쓰신 것처럼, 영구적이지 아니해서 임시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매년 만들어 놓은 보가 홍수때 떠내려 가고 이듬해에는 다시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이런 보라도 있으면 없는 곳보다 훨씬 나아서 모내기가 비로소 가능해졌다.

우리나라 조선후기 농업혁명은 보 건설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가 건설되는 곳은 모내기가 가능해졌고 생산성의 비약적 성장이 뒤따랐다.


김단장 쓰신 글을 보니 매년 홍수 때만 되면 떠내려가는 보에 대한 기술까지 있는지라, 과연 다시 한번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P.S.) 김단장 글에 쓰신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보가 이미 조선후기에 모내기 관련하여 없는 데가 없었다.

왜 이렇게 조선시대에 이미 사방에 깔린 보를 요즘 들어 처음 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최근에 늘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이 양반들은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는 분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P.S.2) 우리나라 수리치수의 기본은 시종일관 저수지가 아니라 보였다.

저수지가 한국 논이나 밭에 물대기의 주류가 되어 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사를 공부하는 분들에게는 상식이나 다름 없는 사실로 안다.

저수지가 우리나라 농사 짓는 농업용수의 주류가 된 것은 (언제 시작되었냐의 이야기가 아니다) 필자 짐작으로는 생각보다는 훨씬 늦다고 보는데, 자세한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이만 쓴다.


일본의 전통방식 모내기. 일본은 모내기를 우리처럼 난리치면서 도입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보다 훨씬 나은 조건이었기 때문. 일본이 우리보다 온난한 기후에 모내기를 빨리 받아 들이면서 양국간 경제적 격차가 매우 커지게 되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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