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에도시대에는 사무라이 중 하나모토旗本라는 이들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타모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성립시키던 당시,
그의 직속 무사였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에도 막부에서 번의 영주가 된 집안과 달리,
봉록은 1만석 이하로서 영주는 아니지만, 영주와 같은 레벨로 취급 받았다.
쉽게 말해 아무리 막강한 번이라고 해도 그 번의 번사(영주의 신하)들은
쇼군의 입장에서 볼 때 배신으로 직접 대면할 자격이 없던데 반해,
하타모토는 낮은 봉록을 받는 이는 겨우 몇 백석짜리 봉록을 받는 이들까지 있었지만,
이들은 이론적으로 쇼군을 직접 대면할 수 있었다.
이들을 하타모토라 한다.
이 하타모토는 유사시 쇼군의 직속부대가 되어 싸울 사람들로,
흔히 일본사에서는 "하타모토 8만기旗本八万騎"라고 한다.
이들이 유사시 소집되어 다 모이면 8만 기 정도가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집안의 경제야 영주에 비할 수준이 못되지만,
가격이 영주와 같은 수준이었으므로, 사무라이 중 최상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영주들과 만날 때 하타모토들은 봉록과 상관없이 항례를 했다.
둘 다 쇼군의 직속 신하의 자격이니 당연하다 할 것이다.
언젠가 썼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 정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정작 요즘 제대로 조명받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하타모토라 할 서울-경기 일원의 사족들이다.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 서울 경기 일원에 자리잡은 사족들은 거의 종가고 뭐고 다 해체되었지만,
정작 향촌의 사족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조선시대는 이들 지방 사족들의 시대였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조선시대는 건국부터 망할 때까지 서울 근교에 거주하던 사족들의 세상으로,
서울에 살던 사족들이 대과나 사마시 급제자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배출했으며,
대과 급제 후에도 관직에 나간 비율을 보면, 거의 이 지역 사족들이 사실상 독점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서울 인구라고 해봐야 조선시대 전기에 20만, 후기에 30만 정도였다는 건데,
그 중에 절반 가까이 되었다는 서울지역 노비 빼고 평민 빼고 나면 겨우 몇 만 남짓했을
수도 한성부 사족들이 조선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조선 전 기간을 통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사실이었다 할 것이다.
요즘 지방 향촌 사족들의 종가들이 워낙 메스컴을 타서 그렇지만,
사실 이렇게 향촌 사족들은 그 동네에서의 명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에는 사실상 관직도, 과거급제자도 거의 없는 "유학의 바다"에
가끔 생원 진사시 합격자를 낳는 정도의 집안이 그 지역 "유종"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에 서울에 살던 세족들은 과거를 서울에서 치르며,
그 경제적 백그라운드는 서울에서 좀 떨어진 경기도 일대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집안이 대대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과거급제자나 관직 등에서 향촌 사족들과는 비교 불가한 수준인 경우가 많다.
흔히 "우리 조상이 경기도 어디에 선산이 있고, 원래 대대로 서울 살았다는 사족 집안"이라면,
이들이 바로 앞서 말한 조선의 사실상 권력을 쥐고 있었던 최상부 사족들의 후예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하겠다.
이들이 사실상 "조선의 하타모토" 같은 이들로,
조선시대 내내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정작 조선이 망한 후에는
일본의 하타모토 계급처럼 그대로 분해되어버렸고,
일본에서도 정작 지방의 번주 집안들은 오히려 더 유명한 경우가 많으니,
이들을 일본의 하타모토와 같은 수준의 계급이라고 보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 본다.
'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800년 지난 지금도 왜 그리 멀쩡한가? 팔만대장경의 싱거운 미스터리 (0) | 2026.10.03 |
|---|---|
| 조상을 귀족으로 만드는 일이 효도일까 불효일까 (0) | 2026.10.02 |
| 뻥이 아니면 역사 기술이 안 되는 한국문화사 (0) | 2026.10.02 |
| 사림의 시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16세기 조선 사회 동향 (0) | 2026.10.02 |
| 세균을 박멸하고 수많은 사람을 구한 비누 님 (0) | 2026.10.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