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상투쟁사에서 특이한 점은 불교가 도입한 이래, 그 쟁투는 시종 도불 투쟁이었다는 사실이다.
더 특이한 점은 이미 불교 도입과 더불어 중국 주류 사상사를 道·佛·儒의 세 흐름으로 당시 이데올로그들이 간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문제는 이 사상 투쟁에서 언제나 유교는 방관자였다.
왜인가?
유교에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없으니, 그것으로 둘이 싸운 판국에 유교가 끼어들 틈바구니는 없었다.
이 결함을 예리하게 인식하면서, 우리도 인식론과 존재론을 구축하자 해서 들고 일어난 흐름이 바로 당말에 겨우 한유와 이고가 발판을 마련하고 송대에 들어와 활개를 치게 되는 성리학이었다.
당말 혹은 송대 이전 유학에서 心을 논한 글 없다. 있어도 애들 장난 수준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心이 느닷없이 중대한 문제로 대두하거니와, 이로써 유학은 비로소 형이하학을 벗어나 형이상학의 영역에 들어선다.
남들은 천지 붕괴와 이를 통한 우주 탄생 비밀을 논하거나, 혹은 우주삼라만상은 인연의 교집합이라는 설을 들고 나와 고담준론을 논하는데, 유교가 내세울 것은 암 것도 없었다.
공자도 맹자도 순자도 동중서도 천지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말한 적이 없고, 그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 네트워크에서 형성되는지를 논한 적 없으니,
항상 사상 투쟁을 그에서 출발하는 저 도불투쟁에서 유학은 설 곳이 없었던 것이니, 그러면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논박이란
허황되다. 허탄하다는 분노 뿐이었으니, 그것이 폭발한 것이 한유의 저 논불골표論佛骨表였다.
성리학은 항용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듯이 불교 개중에서도 禪에서 대폭 존재론과 인식을 차용하게 되니,
존재론에서 바로 태극을 주목하고, 주역에서 찾아낸 태극을 발명함으로써, 이를 무한대로 확장해, 음이니 양이니 하는 요상한 대립 개념을 설정하고 그 충돌과 교집에서 생명 존재 탄생의 비밀을 찾았던 것이다.
인식론에서는 뒤늦게 맹자와 순자를 주목해 성선설 선악설을 心學으로 끌어올렸으니, 이를 두고 박터지는 싸움을 전재하게 되니,
이 존재론과 인식론을 집대성한 이가 바로 주희였다. 그는 알려졌듯이 한때는 중이었다. 그가 실망한 것은 현실세계의 중이었지만, 그에서 유교를 유교답게 만들 엑키스를 다 뽑으니, 그가 말한 성리학은 실은 선종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교가 더럽게 어려워진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출건해야 하므로 여기까지만....
(2017.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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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도입 이전, 그리고 그것이 착근하고서 도교와 일대 쟁투를 여러 차례 벌이는 과정에서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를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던 유교가 그 쟁투에 나도 함 찡가줘 하고 한 다리 걸치기 시작한 시점이 한유 이고에 와서와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을 어찌 볼 것이다.
중국사에서 사상 투쟁은 어느 시점까지는 언제나 도불道佛 맞짱뜨기였지, 유학이 낄 틈바구니 자체가 없었다. 이 사상사 철학사 투쟁은 언제나 道佛의 특권이었으며, 유교는 끼지도 못했다는 이 심각성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동아시아 사상사를 해명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한유 이고가 단초를 마련하고 북송시대 마침내 착근 단계를 거쳐 남송시대 주희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는 성리학의 탄생이야말로 동아시아 사상사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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