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곧 지금의 울릉도가 왜 그리 신라한테 중요했는지, 이 지도 한 장으로 충분하다.
신라가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해간 과정은 그 통로 특성으로 볼 적에 육로와 해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특히 해로를 통한 동해안 확장은 아주 집요해서 신라는 생득적으로 왜 동해를 장악해야 하는지를 알았으니, 이미 파사왕 무렵인가 강릉 일대를 먹어버렸으며, 자비 소지왕 무렵에는 다시 그 북쪽 함흥평야 일대까지 수중에 넣었다.
지금의 마운령 황초령 턱밑까지 신라가 새로이 개척한 영토를 순수해? 뭐 그렇다니깐 이 땅을 진흥왕이 개척한 줄로 착각하는 놈 천지다. 그 순수비는 신라가 새로 개척한 땅이라 했지, 진흥왕이 개척한 땅이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삼국사기 봐라! 신라가 진흥왕 때 저 땅을 개척해? 자비왕 소지왕 무렵에는 이미 죄다 먹은 상태였다. 내물왕 무렵에 이미 지금의 강원도 고성 일대까지 먹어버렸다.
기원전 57년 건국한 신라는 400년이 지나 동해안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저쪽을 장악한 힘은 무엇인가?
해군력이었고 해로였으며 항해술이었다.
신라는 결코 함경도 일대 해안을 개척하는데 육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으니, 그에 닿는 육로가 개척된 때는 무열왕 문무왕시대 의상을 기다려야 했다.
의상은 지금의 강릉 땅에 낙산사를 개창하고 그 주신으로 관음보살을 안치했다.
그 의미를 읽어내는 놈이 없다.
관음이 뭔가? 해신海神이다. 바다의 수호신이며, 해군의 수호신이며, 바다상인들의 수호신이다.
관음을 주신으로 봉안한 낙산사를 왜 의상이 하필 바닷가, 그것도 신라가 관장하는 동해안 국토 한복판 하슬라주에다가 만들었겠는가?
낙산사? 낙산사라는 말이 무슨 뜻인 줄 아니? 항구라는 뜻이다. 항구가 있기에 그 항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신이 필요했던 것이며, 그 필요를 충족하고자 의상은 관음보살을 들고 나온 것이다.
육로를 통해 인도를 들어간 동진 승려 법현이 해상으로 귀국할 때 안전을 기원하며 등때기에 울러매고 다닌 관음을 들고 나온 까닭은 강릉이 바로 항구였기 때문이다.
낙산사? 관음보살? 이 두 키워드를 통해 역사를 하는 사람들이 읽어내야 할 것은 불교의 확산도 아니며, 경주에서 소백산맥, 그리고 태백산맥을 넘어가는 육로의 개척이 아니다! 바로 해로다.
저 낙산사 개창은 신라의 동해안 개척 경영이 완성을 고하는 일대 팡파르였다. 그것은 메시의 대관식이었다.
바로 이에서 울릉도가 지닌 진정한 가치가 폭로하며, 나아가 이 폭로를 통해 왜 신라가 그보다 100년 혹은 200년 전 이사부를 파견해 저 땅을 정벌하고는 직접 통치를 꾀하고자 했는지가 비로소 판연히 드러난다.
동해를 장악하고 경영하고자 하는 신라에 누가 위협이었는가? 이를 물어야 한다.
고구려? 고구려는 동해안에 진출조차 했는지도 나는 의심한다.
고구려가 동해에 욕심을 내기는 했지만 결코 신라가 관장하는 그 동해안을 침범할 수가 없었다. 아주 가끔 하슬라에 변방 장수가 침입하기도 했지만, 깔짝거리는 수준이었고, 그런 까닭에 신라가 관장한 동해안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고 대신, 신라를 피해 저 위쪽 동해를 주목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두만강 어구, 혹은 블라디보스톡 쪽이었다.
고구려는 결코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를 지배한 적도 없다. 그 개마고원조차도 고구려나 신라 양쪽을 오가는 말갈 계통이었다. 후대 여진이니 일컫는 그들의 땅이었다.
동해 제국 신라에 가장 큰 위협은 말갈이었다. 이 말갈은 시대에 따라 여러 이칭이 있거니와, 그것이 무엇이건, 개마고원 백두산 일대를 주무대로 생활하는 이들은 완전한 유목민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한 농업 정주민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들이었으니, 이들의 주특기 중 하나가 바로 항해술이었다. 이들은 항해에 뛰어났다.
이 전통은 면면이 이어져 고려시대가 되면 유감없는 위력을 발휘한다. 거란 혹은 여진은 걸핏하면 그네들 주특기인 항해술을 바탕으로 서해상에서는 남쪽으로 쫓겨내려간 남송을 위협했고,(이 점에서 저 땅에서 발흥한 발해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왜 그네들이 하필 산동을 쳤겠는가? 이 전통을 알지 못하면 안 되는 소이다.) 동해 방면에서는 걸핏하면 배를 타고 남하해서는 경주와 주변을 턱밑에서 위협하곤 했다.
그에서 만족치 못한 일부는 울릉도를 디딤돌로 삼아 아예 일본 열도로 치고 들어갔다.
우산국이 지닌 가치는 바로 이것이다.
왜 신라가 우산국을 쳤겠는가? 그것이 끊임없이 남하하며 신라에는 젖줄과도 같은 동해안 지배를 시종 위협하는 일대 강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산국을 정복함으로써 신라는 비로소 말갈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네들의 중간 보급기지를 차단한 것이다.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3. 1. 1 ~ 2023. 1. 1 (1) | 2023.01.01 |
---|---|
한글사랑, 한글을 옥죄는 괴물 (2) | 2022.12.28 |
신라왕경을 장안성 평원경에 끼워맞추지 마라! (0) | 2022.12.21 |
파리, 꼴랑 한 번 보고 골백 번 본 듯한 환상 (0) | 2022.12.20 |
[김태식의 독사일기] 법금法禁의 해체와 국민의 탄생 (0) | 2022.1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