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순수비 논문 쓴다고 비봉碑峰에 몇번 올랐다. 보다시피 온통 암반이라, 이 일대에서는 조난사고가 요즘도 심심찮고, 사망에 이르는 일이 많다. 그만큼 험준한 곳이다.
그 전에 이곳에 처음 올랐을 적에 나는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대한 기존 해설이 모조리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런 문제 의식을 담아 공간한 논문이 「봉선대전封禪大典, 그 기념물로서의 진흥왕 ‘순수비’」, 『백산학보』 68, 2004 라는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진흥왕순수비에 대한 김정희 의래 150년간의 통설을 뒤집어 엎었다고 자신했다.
나는 내 주장이 사실이거나 그에 가깝기를 바라지만, 학문을 하는 목적은 새로운 관점의 제시라고 본다.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나,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진흥왕 순수비 연구는 이후 폭발적으로 늘었으니, 이 논문 이래 순수비에 대한 관점은 그 입비 목적에 집중하거니와, 그에서 주로 김태식을 씹기에 여념이 없으니, 나는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본다.
( October 18, 2015 글을 손질했다. )
新羅眞興王はなぜ険しい山の頂に上がったのか?
眞興王巡狩碑関連論文を書くために碑峰に数回上がった。写真から分かるように一面巖盤と、この一帶で遭難事故が最近も退屈せぬように起こり、死亡に至ることが多い。それだけ険しいところである。
この写真は、撮影日が2011年10月16日である。
その前に、ここに初めて上がった時に、私は眞興王巡狩碑に對し、既存解說が全部間違っていると思った。
從來の壓倒的な見方では、新羅眞興王が儒家的王道政治を標榜するために北漢山に巡狩をしは、その記念に、この碑を立てたのである。
私が見た北漢山碑峰現場は儒家的王道政治を標榜したり、宣傳することはできない險峻た岩山だった。
では、なぜ眞興王は、このようなところに行次したか天神と地祇を祭祀するためだった。特に天神を祭祀するためには、空の近くでなければならいた。眞興王は山上祭典を擧行たものである。
山上から天神や地祇を祭祀するritualが何であるかそれがまさに封禪ある。
そのような問題意識を込めて公刊した論文が「封禪大典、その記念物としての眞興王」巡狩碑」」、「白山學報」68、2004という文である。
私はこの論文を眞興王巡狩碑の秋史金正喜(1786〜1856)以來150年間の通説を覆したと自信を見せた。
私は私の主張が事実であるか、それに近いことを望まが、學問をする目的は、新たな視点の提示と思う。
自分の勘違いなのか分からないが、渋滞状態を脱するなかった眞興王巡狩碑研究は、その後爆発的に増えたので、この論文以来巡狩碑の視点は、その立碑目的に集中ハゴニワ、彼から主に金台植を批判するに餘念がないので、私は私が仕事だたと思う。
(October 18、2015文を手入れ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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