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宮은 정의가 너무 간단해서 왕王이 사는 집이다. 그 집을 궁宮이라 하지만 시황제 이전엔 신분에 관계없이 집이라고 할 때 쓰던 말이었다.
요새 돈께나 있는 사람들은 집이 한 채가 아니라 오피스텔도 있고 별장도 있는 거랑 마찬가지로 왕은 본가 외에도 무수한 별채를 거느렸으니 큰집에 해당하는 본채를 정궁正宮 혹은 법궁法宮과 같은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기타 우수마발은 이궁離宮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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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궁이 탄생하는 절대의 조건이 잔소리 대마왕 위리안치였다. 절대권력자로 군림하는 왕이라 해도 강상의 윤리는 거스를 수 없어 마누라야 싫어도 데불꼬 살면서 안주인 역할을 맡겼지만 문제는 엄마나 할매.
나이 들어가며 잔소리 많아지기는 이 엄마나 할매가 더 심했으니 오죽 성가신 존재인가? 왕이 잔소리에서 해방되려면 무엇보다 이런 할마시들을 골방에 떼어놓아야 했다.
물론 그 골방은 삐까번쩍했으니 이를 효도라 포장하기 딱 좋았다.
이궁이 탄생하는 또 하나의 통로는 상왕의 존재였다. 왕은 죽음과 더불어 퇴위하나 책임은 없고 권리만 주장하고자 이방원처럼 물러나는 쇼를 하기도 하고 또 이성계처럼 아들놈한테 쫓겨나 허수아비로 전락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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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왕들은 예우 차원에서라도 별도 공간을 마련해주어야 했는데 하늘에 태양은 두 개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도 물론 이런 일이 孝로 대서특필되고 선전되었다.
조선시대 궁궐 중에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에 견주어 창덕궁과 합칭해 퉁쳐서 동궐東闕로 지칭한 창경궁은 그 생성과정에서 저 두 가지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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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창경궁은 물론 임란 때 모조리 불탄 것을 광해군이 중건한 데 골격을 두지만, 적어도 창경궁이라는 이름을 비롯해 그 직접 역사는 성종 14년(1483)을 기점으로 삼는다.
잔소리 대마왕이라는 측면에서 성종만큼 불행한 왕이 없다. 자신이 어머니 혹은 큰어머니 혹은 할머니로 모셔야 하는 왕실 여성이 너무 많았다. 이들을 어찌 처치할 것인가? 이 잔소리에서 어찌 내가 해방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다.
저 할매들을 한군데로 몰아넣자! 한군데로 몰아넣어 서로 싸워서 지치게 하자. 그래야 내가 좀 나아진다. 무릎을 친 성종은 결단을 내린다. 적절한 자리를 물색하라는 하명에 곧이어 마뜩한 후보지라 해서 올라오니 그곳이 바로 수강궁壽康宮 옛 터였다.
이곳에다가 효도를 빙자해 으리으리한 대궐을 짓고는 이름하기를 창경궁昌慶宮이라 했으니, 낙성식에 즈음해 성종은 이곳으로 잔소리 할매들을 모조리 몰아넣었으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할아버지 세조의 정비이면서 자신한테는 직접 할매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작은아버지 예종의 비인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韓氏, 그 자신이 즉위하면서 덕종이라는 존호를 바친 아버지 의경세자懿敬世子 비이자 자기 엄마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 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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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사람을 위한 별도 공간을 마련하고 그들을 한 군데로 몰아넣음으로써 성종은 비로소 평안한 나날을 맞이하게 된다.
창경궁이라는 이궁이 탄생한 비밀은 효도로 포장했지만, 실장은 불효 막심하기 짝이 없는 음모로 말미암음이었다.
한데 이 창경궁은 그 태생이 이방원이었다. 권력 투쟁 끝에 권력을 쟁취한 세종 이도는 초창기 한동안은 허수아비 같은 신세였으니, 그걸 인내한 이도 또한 무서운 사람이다.
그 아버지 이방원은 죽은 시점이 음력으로 1418년 8월 10일이지만, 퇴위한 시점은 1400년 11월 13일이다. 으랏? 퇴임하고도 물경 8년이나 더 살았네?
그가 퇴위한 1400년 8월 이래 그가 죽은 1418년 8월까지 만 8년간 세종은 말이 왕이었지, 아버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물러난 이방원이 일찍 죽어줘야 했지만 실권을 쥔 명예회장 진양철이었다.
함부로 병권에 관한 일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돈이자 아들의 장인까지 무참히 살해한 냉혹한이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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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왕은 엄연히 세종이니, 제아무리 절대권력을 쥔 이방원이라 해도 그런 아들을 위해 물러나는 폼새를 보여주어야 했으니, 그렇다고 아들이 집을 비우고 딴 살림 차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아들한테 왕위를 물려준 바로 그해에 자신이 별채를 마련하고는 대한통운 불러다가 이삿짐을 옮겼으니, 그렇게 해서 들어간 집이 수강궁壽康宮이다.
그 별채 이름 수강은 말할 것도 없이 강녕하게 천수를 누리시라는 의미를 담았으니, 그 이름은 이방원 자신이 지었을 리는 만무하고(그렇다면 얼마나 가오상하는 일인가?) 아들 이도가 지어바친 것이다.
이 수강궁이 훗날 창경궁으로 둔갑해서 잔소리 대마왕 왕실 할매들을 위한 여성 전용구간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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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가 애초 의도한 대로만 흘러가지 아니한다. 저 왕실 여주인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나중엔 한 명도 남지 않았을 적에 왕이 보니? 어랏 여도 괜찮네? 해서 눌러앉기도 했으니, 그렇게 해서 이궁이 본궁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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